진리의 길
청산처사 편저
1. 제장; 절
1.1. 절의 의미
절은 부처님을 모시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닦는 성스러운 곳으로 불,법,승 삼보가 두루 갖추어져 있는 道場(도량)이다.
“절은 부처님을 모셔놓은 곳이다.” “절은 스님들이 사는 곳이다.” “절은 절을 하는 곳이다.” “절은 복을 비는 곳이다.” “절은 불도(佛道)를 닦는 곳이다.”등등의 말이 있다.
또 “절은 절을 하니 절이요, 절을 하면 모든 것이 절로 된다 하여 절이다.”는 속언도 있다.
절은 성스럽고 장엄한 수행의 도량이며, 우리들의 마음을 닦는 곳이며,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는 참회의 도량이며, 꾸준히 노력하는 정진의 도량이다.
절을 가리켜 다른 말로는 가람(伽藍), 정사(精舍), 승방(僧房), 사찰(寺刹), 사원(寺院), 정람(精藍), 전당(全黨) 등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가람(伽藍)이란 인도 말로 승가람마(Sȃnghȃrȃma)의 줄인 말이다. 번역해서 중원(衆園)이라 하며, 여러 스님들이 모여 불도를 수행하는 곳을 말한다.
우리 나라 말의 절은 테라(Thera)라고 하는 인도말(팔리어)에서 나온 것이라고도 하고 또 우리 나라에 불교가 처음 전래될 때(신라) 서역의 스님인 묵호자 스님이 우리 나라에 와서 모례(毛禮)라는 사람 집에서 불도를 펴기 시작한 연유로 모례가 음대로 털례가 되고 변해서 절로 되었다고도 한다.
스님들은 절에 항상 머물면서 정진에 정진을 거듭하는 한편 교화에 힘쓰고 在家佛子(재가불자)들은 절에 가서 세속에서 찌들은 속진을 말끔히 씻어 버리고 새사람이 되어서 다시 올바른 새 생활을 할 수 있는 새 힘을 얻는다.
절은 洗心(세심) 수도의 도량이며 成佛作祖(성불작조)의 전당이다. 多生多劫(다생다겁)으로 업해파랑에 침윤된 自性을 고요한 마음으로 연마하고 탐진 번뇌에 오염된 自身을 세척 해탈토록 하는 것이 바로 사원이다. 재재처처가 佛刹佛身(불찰불신)이오, 삼라만상이 淸淨法身(청정법신). 어느 곳 어디엔들 常寂光土(상적광토)가 아닐 수 없으며 무량수 무량광이 아닐 수 없겠습니까마는 지혜가 암둔하고 업장이 후중한 우리 중생들로서는 볼 줄 모르며 청정법신속에 호흡을 같이하고 살면서도 진체를 보지 못하는 것이 그지없는 업연의 소치인 까닭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절을 열심히 다녀 업장을 소멸하여 필경 성불하여야 한다.
1.2. 최초의 절-죽림정사(竹林精舍)
부처님께서 성도 하신 뒤, 여러 곳을 돌아다니시며 교화하시는데 마가다국의 큰 부호 장자가 대나무 숲이 있는 동산을 바치고 왕인 빔비사라와 신하들이 그 죽림원에 수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강당과 집을 지어 드렸는데, 이것이 절의 시초가 되는 죽림정사(竹林精舍)라 한다. 부처님의 교화를 받고 설법을 얻고자 몰려드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수행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이후 기타태자와 수닷타 장자가 기증한 기원정사(祈圓精舍) 등이 있고, 중국에 와서는 왕실에서 지은 백마사가 처음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고구려 소수림왕 5년(375)에 성문사(省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세운 것이 절을 세운 시초라고 한다.
1.3. 우리 나라 유명한 절
1.3.1. 적멸보궁(寂滅寶宮)-보궁(寶宮)
우리 나라 절 가운데는 불상(佛像)을 전혀 모셔놓지 않은 데가 있다. 법당 안에는 단(壇.戒壇)만 있고 속이 텅 비었으며 법당 밖 뒤편에는 사리탑을 봉안하여 놓은 곳이다.
이러한 곳을 적멸보궁, 또는 보궁이라 하는데 이는 사리탑에 부처님의 진신(眞身) 사리를 모신 보배로운 곳이란 뜻이다. 신라 진덕왕 때 자장(慈藏) 스님이 중국 오대산에 가서 문수 보살을 친견하고 부처님 가사와 사리를 받아와 우리 나라의 가장 수승한 땅에 부처님 사리를 봉안하여 모셨는데 경남 양산 통도사(通度寺)에 부처님 가사와 사리를 모시고 금강 계단을 세웠다.
그리고 강원도 설악산 봉정암(鳳程庵), 오대산 상원사(上院寺)에 각기 사리를 모시고 적멸보궁을 지었다 한다.
또 강원도 영월 사자산 법흥사(法興寺)와 태백산 정암사(淨岩寺)에도 부처님사리를 봉안하고 적멸보궁을 세웠다. 이로써 이곳을 3대 적멸보궁, 5대 적멸보궁이라 통칭한다.
1.3.2. 삼보 사찰(三寶寺刹)
우리 나라에서 세 군데 절이 삼보 사찰이라 불려지고 있다. 이는 불보(佛寶) 통도사, 법보(法寶) 해인사, 승보(僧寶) 송광사(松廣寺)를 말한다.
㊀불보 사찰
불보 사찰이란 부처님의 진신(眞身) 사리와 가사를 봉안하였다 하여 통도사를 말한다.
㊁법보 사찰
법보 사찰이란 부처님의 법(가르침)인 팔만대장경을 봉안한 곳이 해인사라 하여 법보 사찰이라고 한다.
㊂승보 사찰
승보 사찰은 우리 나라 절 가운데 훌륭한 스님을 가장 많이 배출한 곳이 송광사라 하여 일컫는 말이다. 송광사에서는 보조국사 이래 16국사가 배출되었다.
그러나 널리 보아 우리 나라의 절이 모두 삼보 사찰이 아닌 곳이 없다 하겠다. 어느 절이건 부처님을 모시지 않은 절이 없고, 불법이 없는 곳이 없으며, 스님이 다 계시기 때문이다.
또 각 절들의 특색을 말하기 위해 관음도량, 문수도량,나한도량 등으로 어떠한 도량이라 말하기도 하고 또 무슨 기도처라고 말하기도 한다.
1.3.3. 구산선문(九山禪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부터 불교가 한창 융성할 때에, 큰 스님들이 중국에 가서 달마선법(達磨禪法)을 받아 가지고 와서 선풍(禪風)을 크게 드날린 곳이 구산선문이다.
㊀전남 남원군 지리산 실상사 - 홍척 국사
實相山 實相寺(실상산)
㊁전남 곡성군 동리산 태안사 - 혜철 국사
桐裏山 泰安寺
㊂전남 장흥군 가지산 보림사 - 도의.염거.체증 국사
迦智山 寶林寺 道義
㊃충남 보령군 성주산 성주사 - 무염 국사
聖住山 聖住寺
㊄강원 명주군 사굴산 굴산사 - 범일 국사
闍崛山 崛山寺 梵日
㊅경북 문경군 희양산 봉암사 - 지선.극양 선사
曦陽山 鳳巖寺
㊆강원 영월군 사자산 흥령사 - 도윤.절중 선사
獅子山 興寧寺
㊇경남 창원군 봉림산 봉림사 - 현욱.심희 선사
鳳林山 鳳林寺
㊈황해 해주군 수미산 광조사 - 이엄 조사
須彌山 廣照寺 利嚴
☞ □안의 숫자는 구산선문 형성 순서를 나타낸다.
지금은 거의 쇠퇴하고 문경 봉암사가 조계종 특별 선원으로 지정되어 선문을 열고 근래에 곡성 태안사가 청화 스님에 의하여 금강선원으로 선문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1.4. 우리 나라 절의 구조
예로부터 내려온 우리 나라의 큰 절들을 찾으면 절의 구조가 복잡하고 건물마다 한문으로 현판이 걸려 있는데 어리둥절하게 된다.
우리 나라 절의 구조와 건물 배치 등에는 일정한 규정은 없으나 이루어진 형식에 따라 ‘쌍탑식 평지 가람’ ‘일탑식 산간 가람’등으로 나누고 있다.
이것은 절의 중심을 이루는 본 건물에 하나의 탑으로 이루어진 형식인가, 쌍탑(雙塔)으로 이루어진 형식인가에 따라 붙여지는 것이다.
대개 절의 중심부는 본 건물과 탑을 중심으로 하니, 이는 불상과 부처님 사리(佛舍利)를 받드는 불보(佛寶) 존중의 뜻이다. 절 중앙의 법당 양편으로 승방(僧房)이 있어 스님들이 수행하는 곳으로 삼고 각 부속 건물이 주위에 배치되어 있다.
1.5. 절 건물 명칭
1.5.1. 일주문(一柱門)
절에 들어가는 어귀에 우뚝 서 있는 문으로, 기둥을 양쪽에 하나씩만 세워서 지어진 것이 다른 건물과 다르다.
이 문을 경계로 하여 문 밖을 속계(俗界)라 한다. 문 안은 진계(眞界)인 것이며 이 문을 들어 설 때 오직 일심(一心)에 귀의한다는 결심을 갖도록 마음을 촉진시키는 데 그 뜻이 있다.
현상 면에서 나타난 것은 삼라만상이 따로 떨어져 있어서 하나가 아닌 것 같지만 실상인 본질 면에서 보면 그 모든 것이 둘이 아니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니고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며, 반야(般若)와 번뇌(煩惱)가 둘이 아니다. 재가와 출가가 둘이 아니며 시간과 공간도 둘이 아니요,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다. 누구든지 이 일주문에 들어오면 이 진리를 깨닫고 잃었던 본 바탕을 되찾으라는 뜻으로 일주문이 새워진 것이다.
1.5.2. 천왕문(天王門)
봉황문이라고도 하며 본래 맑고 깨끗해야 할 부처님의 세계를 지키는 사천왕(四天王)을 모신 문이다.
동쪽의 持國天王(지국천왕), 서쪽의 광목천왕(廣目天王), 남쪽의 증장천왕(增長天王), 북쪽의 다문천왕(多聞天王)깨서 삼보(三寶)를 지키시는 문이다.
나쁜 것을 깨 버리고 올바른 길을 펼치려는 마음을 일깨워 주고 있는데 그 뜻이 있다.
지국천왕은 비파(琵琶)를 들고 증장천왕은 보검(寶劒)을 잡았으며 광목천왕은 용관, 여의주(如意珠), 또는 견색(絹索; 새끼줄)을, 다문천왕은 보탑(寶塔)을 받쳐든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보편적이다. 대체로 이들 사천왕은 왼쪽에 동.남천왕, 오른쪽에 서.북천왕이 배치된다.
이 사천왕들은 불교경전에 나타나는 인도 재래의 神(신)인데, 불교의 수호신이 되어서 사방을 지키게 된 것이다. 일정한 모습이 처음부터 규정된 것이 아니어서 인도에서는 귀족의 모습으로 표현되었고 중앙 아시아나 중국, 우리 나라로 전파되는 동안 무인상(無人像)으로 변형되었다.
1.5.3. 금강력사(金剛力士)
인왕(仁王)이라고도 하는데 문을 지키는 수문장 구실을 하는 신이다. 불법을 수호하는 분으로 절의 어귀나 문의 양쪽에 두 분을 모시고 있다.
흔히 상체를 벗은 반나체에 허리에만 옷을 걸치고 있으며 날래고 용맹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 손은 권법(拳法)을 짓거나 금강저(金剛杵)를 들고 있는 독특한 모습이다. 금강과 같은 지혜로써 번뇌를 꺾어 없애므로 금강력사라 이름한 것으로 보인다.
1.5.4. 해탈문(解脫門)
말 그대로 모든 괴로움과 헛된 생각의 그물을 벗어나 아무 거리낌이 없는 진리의 깨달음을 얻는 문이다. 이 문은 정진(精進)을 촉진시키는 중대한 의미를 갖고 있다.
1.5.5. 불이문(不二門)
불이(不二)란 뜻은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요, 세속과 부처의 세계가 둘이 아니며, 선악(善惡), 유무(有無), 깨끗함과 더러움, 등등 상대적 개념에 대한 모든 대상이 둘이 아니라는 의미다.
이 불이사상(不二思想) 속에 담겨진 불교의 진리는 매우 미묘한 법문을 간직하고 있다고 하겠다.
2. 제장; 主佛殿(주불전)
한 절에서 그 중심이 되는 신앙 대상인 부처님을 모신 불전을 주불전 또는 금당이라고 한다. 부처님은 반드시 금빛과 같은 빛이 나는 것이 원칙이므로 통칭 金人(금인)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부처님이 모셔진 집이라 해서 금당이라 불렀다. 이 금당은 앞에서 설명한 탑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사원 건물이다. 그런데 이 금당은 주불로 모신 부처님의 이름에 따라 그 명칭이 정해지고 있다.
2.1. 절의 중심부
2.1.1. 법당(法堂)-불당(佛堂)-금당(金堂)
누각에 들어서면 맞은편으로 절의 가장 중요한 법당이 있다. 이 법당을 예전에는 부처님을 모신 집이라 하여 불당(佛堂)이라 하고 또, 부처님은 가장 존귀한 분으로 황금 같으신 몸과 금광명(金光明)을 놓으시는 분의 집이라 하여 금당(金堂)이라고도 하였다.
이후 차차 부처님 법을 받들고 설(設)하는 곳이라 하여 법당(法堂)이라 하여 왔다. 이 법당은 법당 안에 모신 부처님에 따라 명칭과 현판이 각각 다르다.
2.1.2. 대웅전(大雄殿)-큰 법당
불교의 교주인 석가모니 부처님을 봉안한 전각으로 주불전, 즉 금당일 때 이런 이름으로 부른다. 대웅은 법화경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을 큰 영웅, 즉 대웅이라 한 데서 유래한 것으로 큰 영웅인 석가모니 부처님이 기거하시는 집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대웅전에는 석가모니 부처님 불상을 반드시 봉안하게 되는데 대웅(大雄)이란 뜻은 모든 부처님에 공통하는 “위대한 어른”이란 뜻이어서 때로는 다른 부처님을 모시고도 대웅전이라고 하기도 한다.
2.1.3. 팔상전(八相殿-捌相殿)
석가모니 부처님의 일생을 여덟로 구분하여 모습을 나타내 보이기에 팔상(八相)이라 하고 팔상을 모신 집이라 팔상전(捌相殿)이라 한다.
팔상전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중앙에 모시고 좌우로 부처님의 일생을 그린 팔상도를 모신다.
2.1.4. 대광명전(大光明殿)-대광보전(大光寶殿)
-대적광전(大寂光殿)
이것은 맑고 깨끗한 법신(法身)인 비로자나 부처님이 두루 비치는 빛, 즉 광명이니 적광이니 하는 성질을 갖고 있는데서 유래한 것으로 비로자나 부처님이 봉안된 집이라는 뜻이다. 큰 법당일 경우 비로자나와 석가모니, 노사나등 삼신불(三身佛; 法身법신, 化身화신, 應身응신)을 봉안하는 경우가 많다. 비로자나 부처님은 화엄경의 주불로 화엄종 사찰의 주불전일 경우 이 이름을 붙이고 있으며, 주불전이 아닐 경우에는 비로전(毘盧殿)이라고 한다.
2.1.5. 천불전(千佛殿)-삼천불전(三千佛殿)-만불전(萬佛殿)
부처님 일천분을 모신 곳이라 하여 천불전이라 한다.
천분이란 이 세상에 석가모니 부처님 한 분만 아니라 계속 출현하시는 부처님이 천 분이란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에도 부처님이 계셨고 또 이후에도 부처님이 출현하시니 미륵불이 그 예다.
과거, 현재, 미래에 각각 일천 부처님이 계신다 하여 삼천불(三千佛)을 말하기도 하여 삼천불을 모신 곳은 삼천 불전이라 하고, 또 요즈음은 일만 부처님을 모시고 만불전이라고도 한다.
2.1.6. 극락전(極樂殿)-무량수전(無量壽殿)-미타전(彌陀殿)
-무량광전(無量光殿)
극락 세계의 부처님이신 아미타 부처님을 봉안한 불전으로 주불전일 때 극락전이나 무량수전이라고 한다. 대개 미타삼부경(아미타경, 무량수경, 관무량수경)에서 유래한 것으로 정토 신앙 계통의 종파나 화엄종 등의 사찰의 주불전이다. 주불전이 아닐 경우에는 미타전이라 부르는 것이 보통이다.
2.1.7. 약사전(藥師展)
약사여래 부처님을 모신 전각으로 만월전(滿月殿)이라고도 하는데 우리 나라에는 약사전이 상당히 많은 편이다. 특히 대구 팔공산 갓바위 약사여래불, 경주 분황사 약사여래불은 오늘날에도 영험이 높다고 한다.
2.1.8. 미륵전(彌勒殿)-용화전(龍華殿)
미륵 부처님이나 미륵 보살을 모신 불전인데, 다음 세상에 메시아로 강림하는 미륵 부처님을 모실 때는 용화전이라고 하고 도솔천에 있는 미륵존을 모실 경우에는 미륵전이라고 부르지만 대개 미륵전으로 통하기도 한다.
2.2. 각 건물의 명칭
2.2.1. 관음전(觀音殿)-원통전(圓通殿)
관세음 보살을 모신 불전인데 주불전일 때는 원통전이라 부르며 부속 전각일 때는 관음전이라 부른다.
관세음 보살은 모든 중생들의 고난의 소리를 들으시고 대자대비한 마음으로 이를 건져 주시는 분이다.
또 세상의 어느 곳에도 두루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이 원륭하게 통하시는 교화의 주인이시다 하여 원통교주(圓通敎主)라 하기도 한다. 그래서 관음전을 원통전이라고도 한다.
2.2.2. 지장전(地藏殿)-명부전(冥府殿)-시왕전(十王殿)
염라대왕등 10왕을 모신 전각인데 주존은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모신다. 이 세상이 아닌 어두운 세계인 명부 세계(冥府世界)의 왕인 염라대왕을 모신 곳이라 하여 명부전이라 하며, 또한 염라대왕 한 분만 아니라 지옥에 있어서 죄의 경중(輕重)을 정하는 열 분의 왕(十王)을 모신 곳이라 하여 시왕전이라고도 한다.
시왕중 제1 진광 대왕, 제2 초강 대왕, 제3 송제 대왕, 제4 오관 대왕, 제5 염라 대왕, 제6 변성 대왕, 제7 태산 대왕이 있다.
사람이 죽으면 그날부터 49일까지는 7일마다 각 7대왕이 심판을 맡으며 그 뒤 백일에는 제8 평등 대왕, 소상 때는 제9 도시 대왕, 대상 때는 제10 오도전륜 대왕이 차례로 생전에 지은 선업과 악업 등 잘잘못을 심판한다고 한다.
명부 시왕을 모신 주좌(主座)에 지장 보살을 모시는 일이 있는데 이 경우에도 지장전이라는 이름 대신 명부전, 시왕전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예가 많다.
2.2.3. 응진전(應眞殿)-나한전(羅漢殿)
부처님의 제자인 16나한(羅漢)을 모신 전각을 응진전이라고 한다. 그리고 500나한, 즉 부처님의 500제자를 모신 전각은 나한전(羅漢殿)이라 부른다.
2.2.4. 영산전(靈山殿)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묘법연화경을 설한 영산회상(靈山會上)의 장면을 극적으로 묘사한 영산회도(靈山會圖)를 모시기 위하여 특별히 지은 전각이다.
영산회(靈山會)란 석가모니 부처님이 ‘영취산’이라는 곳에서 많은 제자들을 모아놓고 가르침을 베풀던 모임이다.
아라한(阿羅漢;Arahan)은 모든 사람의 우러름을 받을 만한 사람이란 뜻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들을 말한다.
2.2.5. 칠성전(七星殿)
칠성각(七星閣)이라고도 하는데 북두칠성을 모신 전각으로 칠성을 부처님들로 화한 경우가 보통이다. 치성광여래(熾星光如來)를 주불로 모시며 특히 우리 나라에서 가장 성행한 전각이다.
2.2.6. 독성각(獨聖閣)
독성(獨聖)을 모신 곳이니, 이는 부처님이 없는 세상에서 다른 이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 홀로 수행하여 깨달은 이를 말합니다. 독성을 연각(緣覺)이라고도 한다.
2.2.7. 장경각(藏經閣)
부처님께서 성불하신 뒤 설법하신 모든 경전을 보관하여 모셔놓은 곳이다. 장경(藏經)이란 모든 글과 뜻을 포함하여 저축하였다는 뜻이고 흔히 대장경(大藏經), 팔만대장경이라 하여 불교 성전(聖典)의 전집(全集)이라 할 수 있다.
경남 합천 해인사(海印寺) 장경각이 그 대표적 예다.
2.2.8. 선불당(選佛堂)-선불장(選佛場)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당(堂)을 열어서 계(戒)를 설하신 곳을 이름한다. 흔히 선당(禪堂), 승당(僧堂), 좌당(坐堂)의 다른 이름이며 이곳에서 계율을 일러주고 선법(禪法)과 교법을 닦는 곳이다.
또 계를 설하는 곳엔 금강계단(金剛戒壇)이라 현판하는데 통도사 큰 법당의 금강계단이라 현판한 것이 그 대표적 예다.
2.2.9. 조사당(調査堂)-조사전(祖師殿)-조당(祖堂)
부처님의 법을 이어 온 조사(祖師) 스님을 모신 집, 처음에는 중국에 초조(初祖)이신 달마 대사를 모셨는데 뒤에는 한 종파를 세운 스님, 존경을 받을 스님 등을 모시고 나아가 그 절의 창건주, 역대 주지의 영정이나 위패를 모시기도 한다.
2.2.10. 국사전(國師殿)
우리 나라에서 고려 시대부터 나라의 스승이 될만한 스님을 국사(國師)라 하고, 왕의 스승을 왕사(王師)라 하였는데 이러한 국사(國師)를 모신 곳을 말한다.
순천 송광사에 고려 보조국사(普照國師) 이래 열 다섯 분의 국사가 나왔다 하여 16국사를 모신 국사전이 대표적이다.
2.2.11. 그외 수행처(修行處)
이외에도 스님들이 거처하며 공부하는 곳으로 선원(禪院), 강원(講院), 염불원(念佛院), 율원(律院)이 있다.
또 건물에다 심검당(尋劍堂), 심우당(尋牛堂), 연화실(蓮華室), 삼소굴(三笑窟), 미소굴(微笑窟), 응향각(凝香閣), 등의 이름을 지어서 걸고 있다.
2.3. 기타 시설물
2.3.1. 탑(塔 ; Stupa, Thupa)-부도(浮屠)
탑은 부처님의 신골(身骨)인 사리(舍利; Sarira)를 모신 일종의 무덤으로 흙이나 돌을 높이 쌓아 만들었던 것이 기원이며 절에서 가장 귀중하게 받들고 있다. 중국에서는 쌓아올린 벽돌탑, 일본에서는 나무로 만든 목탑, 우리 나라에서는 돌을 깎아 만든 석탑이 발달되었다. 다층탑(多層塔)은 3층에서 13층까지 홀수 탑이 보편적이다.
탑파 건립의 기본 되는 목적은 불교와 교도들에게 가장 소중하고 신성한 예배의 대상을 봉안하는 데 있었기 때문에 탑은 법당과 합께 시대와 장소를 가릴 것 없이 항상 그 중심을 차지하여 사찰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불교의 본 고장인 인도에서는 석가세존이 열반 후 그 육신은 곧 화장되어 여덟 나라에 나누어 져 각 기탑에 안치되었는데 그 때의 탑은 둥근 무덤 같은 모양이었다. 탑을 만드는 재료는 돌, 벽돌, 금속, 나무 등 여러 가지를 사용하였다.
부도(浮屠)는 탑의 한 종류이나 우리 나라에서는 스님들의 사리나 유골을 봉안한다. 흔히 절의 한쪽 편에 부도 터를 잡고 역대 스님들의 사리.유골을 봉안하는 부도를 세우게 되었다.
2.3.2. 찰간(刹竿)-당간(幢竿)
절의 앞에 돌이나 쇠로 만들어 높이 세운 기둥으로 당간이라고도 한다. 옛날에 덕이 높으신 스님을 많은 사람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서 세운 것이다. 찰간에 깃발을 달아 종파, 문파를 알렸다. 행사와 불사 때 행사를 알리고 철당간으로 사역을 알리는 동시에 사원에 모든 액을 물리치는 의미도 있다.
2.3.3. 산신각(山神閣).칠성각(七星閣).삼성각(三聖閣)
토속적인 산신, 즉 호랑이를 모신 전각으로 우리 나라에서 고유하게 발달한 것으로 칠성전과 함께 불교 토착화에서 나온 것이다. 이외에 산신, 칠성, 독성(獨聖)을 함께 모셔놓은 삼성각(三聖閣)등이 있다.
2.3.4. 요사(寮舍).후원(後院).정재소(淨齋所)
절의 살림살이를 하는 곳으로 곳간으로서 필요한 물품을 두기도 하고 스님들의 공양 음식물을 만들기도 하는 곳이다. 흔히 후원, 요사채, 공양간 등으로 불려진다. 특히 공양(밥)을 짓는 곳을 정재소(淨齋所)라 하는데 이것은 부처님이나 스님께 올릴 공양물을 깨끗하고 청정하게 준비하는 곳이란 뜻이다.
3. 제장; 절에서의 예절
3.1. 절에 들어서면서
절(寺)은 일주문 또는 불이문이란 문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문에 들어서면서 인사를 하게 된다.
합장 반배(合掌半拜)를 하게 되니, 문 앞에 서서 공손히 두손을 모아 가슴 앞에 하고 머리와 허리를 굽혀 큰 법당 쪽을 향하고 절을 하는 것이다.
경건한 마음과 단정한 몸가짐으로 절의 경내(境內)에 들어서면서 경내에서 지켜야 할 몇 가지 예절이 있게 된다.
3.1.1. 단정한 옷차림과 공손한 행동
단정한 옷차림과 공손한 행동을 해야 하니 옷깃을 풀어헤치고 팔을 휘저으며 걸어서는 안되고, 말을 할 때도 큰 소리로 희롱하며 웃어서도 안되며 일행이 있다 하여 함께 떠들고 웃고 큰 소리로 말하면 예의에 어긋나는 것이다.
처음 스님이 되려는 행자들에게 절에서 가르치는 예법으로 계초심학입문(誡初心學入門)과 사미율의(沙彌律儀)에서 이와 같으나 일반인들도 지켜야 할 예절로 여기에 간추려 말한다.
『나아가서는 옷을 단정히 하여 걷어 부치지 말고, 뜀박질하지 말고, 쭈그려 앉지 말고, 뒷짐지지 말고, 몸을 흔들며 다니지 말고, 발이나 팔을 흔들며 앉지 말고, 좌우를 두리번거리지 말고, 희롱한 웃음을 짓지 말고, 곁눈질하지 말고, 조용히 앉고 서고 해야 한다.』고 한다.
이는 모두 교양과 품위를 갖추는 일반 상식적인 예절이니 절이 아닌 사회에서도 지켜져야 할 몸가짐일 것이다.
3.1.2. 사원(寺院)에서의 질서를 지켜줄 일이다.
절은 수도 도량(修道道場)이다. 부처님을 받들고 부처님 법을 배우면서 인생의 참된 이치를 찾으려는 수도 도량인 것이다. 한갓 관광 명소나 유원지처럼 여겨서는 안될 것이니 절에 와서 잡된 세상의 이야기들로 쓸데없는 시간을 보내서도 안되고 경내에서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워서도 안된다. 담배를 피워야 할 사람은 재떨이나 휴지통이 있는 곳에서 흡연하는 것이 예의일 것이다.
절 안에 있는 물건이나 시설들은 함부로 만지거나, 기웃거려 살펴보거나 사용해서도 안된다. 아무 데나 침뱉고 오물을 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더욱 안될 일이니 이 모두가 교양에 속한 예절이라 할 것이다.
3.1.3. 만나는 스님마다 합장하여 인사한다.
우리는 흔히 일상 생활에서 악수하는 인사법이 습관화되었듯이 절에서의 합장하는 인사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만나게 되는 스님마다 인사를 해야 할 것이다. 모르는 스님이라 하여 또는 정식으로 주고받는 인사가 아니라 하여 인사하지 않으면 안된다. 인사를 하였던 스님을 다시 만나게 될 때에도 다시 합장 반배하여야 하니 이는 스님에 대한 예절일 뿐만 아니라 내 스스로에게 마음을 쏟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3.1.4. 볼일에 따라 안내를 받아야 한다.
법당에서 부처님께 참배를 올리고자 할 때나 불공을 드릴 일이 있거나, 스님을 찾아 뵙고 상의할 일이 있거나 할 때에는 먼저 스님에게 여쭈어 안내를 받고 허락을 얻어야 한다.
아무런 볼일도 없으면서 이곳 저곳 필요하지도 않은 곳에 기웃거려 수도하는 스님들을 산란케 하거나 일을 방해하여서는 안된다.
물론 절에서는 일반 참배객들을 위하여 법당은 항시 개방되어 있다. 부처님께서 참배하고자 할 때에는 허락이나 안내를 받지 않고도 법당을 자유로이 출입할 수는 있다. 그러나 법당 참배도 그 절에 따라 시간이 있으니 대개 오전 4시부터 오후 9시까지다.
3.2. 법당(法堂)을 출입하는 법
3.2.1. 법당 출입은 가운데 문을 피해야 한다.
법당에는 전면과 좌우로 문이 나 있다. 법당에 출입할 때에는 전(前)면의 문을 피하고 좌우의 문을 이용해야 한다. 혹 좌우에 문이 없고 전면에만 있을 때 역시 중앙에 있는 문을 피하고 전면 양쪽 가에 있는 옆문을 이용해야 한다.
전면 중앙에 있는 문은 어간문(御間門)이라 하여 그 절의 조실(祖室) 스님이나 주지 스님, 법사 스님, 원로 스님 등이 출입하는 문이다. 법당의 중앙에 부처님이 앉아 계신 주좌(主座)에서 정면으로 난 문을 어간문이라 하니 곧, 부처님의 정면으로는 일반 신도는 물론 보통 스님들도 출입해서는 안된다. 뿐만 아니라 부처님 앞인 어간을 지날 때에는 반드시 합장하고 허리를 굽힌 채 지나가야 한다.
법당의 좌우에 난 옆문을 이용하여 출입하면서 문을 여닫는 법도 조용히 정중하게 경건한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하여야 한다.
3.2.2. 법당에 들어서서
법당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돌아선 다음에는 우선 부처님을 향하여 합장 반배(合掌半拜...합장하고 선 채로 허리를 굽혀 인사)한다.
부처님 앞에 나아가 다시 합장 반배를 하고 촛불을 켠다. 이때 촛불이 켜 있으면 초를 준비하였다 할지라도 그대로 탁자 앞에 놓고 향을 사른다.
향을 사를 때는 준비한 향이 많다 하여도 한 가치(一柱香)만 촛불에 붙여서 그대로 향로에 올린다.
향을 사라 올린 뒤 가능하면 다기(茶器)에 청수(淸水.玉水)를 새로 올리고 과일 등을 준비하였으면 또 깨끗이 씻어서 불전에 바쳐 올린다.
3.2.3. 큰절
모든 준비가 끝나면 불전에서 서너 걸음 물러서서 정면을 피하여 절을 올린다. 합장 반배를 한 다음 오체투지의 큰 절을 한다.
큰 절은 적어도 세번이니 그 이상은 아홉번 또는 백팔번, 천번, 삼천번 할 수 있는대로 하게 된다.
절을 하는데 삼배(三拜), 구배(九拜), 백팔배(百八拜)하는 뜻은 세번 하는 것은 불법승 삼보에 각각 올리는 것이요, 아홉 번은 삼보에 각각 세번씩이요, 백팔번은 우리의 백팔번뇌를 참회하는 뜻입니다. 그 이상 천배, 삼천배 많이 할수록 좋다.
큰 절을 하고 맨 마지막에 고두례(叩頭禮).유원 반배(唯願半拜)를 하니 이는 엎드려서 일어나지 않고 팔굽을 땅에 붙인 채 머리와 어깨만 들고 손을 합장하고 고두(공경하여 머리를 숙임)하는 예(禮)인 것이다. 그리고 일어서서는 다시 합장 반배 한다.
3.2.4. 법당을 나서며
법당 안에서 불공을 드리거나 예경을 올리고 볼일이 다 끝난 다음 모든 기물을 제자리에 가지런히 해놓고 켜놓았던 촛불을 반드시 끄고 나와야 한다. 법당을 나서면서 다시 합장 반배를 하고 법당 문을 조용히 꼭 닫아둔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일은 촛불이나 향의 불을 끄는데 불어 꺼서도 안되고 옷소매를 흔들어 꺼서도 안되고 손으로 부쳐서도 안된다고 사미율의에 나와 있다. 손가락으로 초 심지를 눌러 끄는 방법이 일반적이다.
3.3. 불공드릴 때
부처님께 공양(供養)을 올리는 것을 불공(佛供)이라고 한다. 우리는 불공을 드리는 데 여러 가지 경우가 있다.
첫째로, 우리의 삶이 뜻대로 되지 않아 괴로움과 어려움에 부딪쳤을 때 그 고난을 하소연하고 벗어나고자 하는 기원을 올리려는 마음이 그것이다. 하고 있는 사업이 무난히 성공하길 바라고, 건강치 못한 가족이 건강하길 원하고, 풍족하지 못한 살림이 펴나길 원하며, 모든 어려움을 벗어나 안정되지 못한 마음을 편안케 하고자 불공을 올린다.
둘째로, 여러 가지 일이 뜻대로 또는 의외로 이루어 졌을 때 감사하는 기쁜 마음으로 불공을 올린다. 바라던 소원이 성취되었거나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이 성공적으로 이루어 졌을 때 부처님을 찾고 절을 찾아 은혜에 감사하는 불공을 드리게 되는 것이다.
셋째로, 일의 성패와, 고난과 행운의 결과에도 불구하고 항상 부처님의 커다란 위신력과 대자 대비의 공덕을 존경하고 본받기 위한 수행으로, 자기 자신의 성찰과 무량한 공덕으로 민족과 온 세계와 중생의 평화와 안락을 안구하는 염원으로 불공을 올리게 된다.
그러나 그 공덕은 셋째가 가장 크고, 그 다음이 둘째 경우다. 남을 위한 불공은 한량없는 공이 된다.
3.3.1. 근본은 정성이 깃들어야 한다.
불공을 올리려는 마음가짐에서부터 준비하는 과정까지 깊은 정성이 우러나지 않으면 안된다. 그저 해볼까 하는 시답지 않은 마음이나, 어떨까 하는 반신반의나, 행여나 하는 요행심으로 불공을 올린다면 한갓 허공에 금을 긋듯 막연한 일이 되고 만다. 깊은 신심(信心), 굳은 마음, 기필코 이루리라는 간절한 바램과 곧바른 믿음이 성취를 가져오는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3.3.2. 공양물은 청정하고 후덕하게 한다.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은 청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부정스레 준비한 것이나 부정한 마음을 지녔을 때 참된 불공이 되지못한다.
“삼륜이 청정(三輪淸淨)하여 불위도용(不違道用)이어다.”하니, 이는 공양을 올리고 베풀려는 사람이나 공양물이거나, 공양 받는 사람이나 모두 청정하여 도(道)에 어긋나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청정(淸淨)한 마음으로부터 준비하는 공양물이 청정하여야 하니 맑고 청정한 옥수, 좋은 향, 싱싱한 꽃이며 잘 익은 과일 등이 이지러지거나 부서짐이 없이 온전한 것이어야 하며, 또한 떳떳하게 준비되었을 때 청정한 공양물이 될 것이다.
또한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인색하지 않고 후덕해야 한다. 내가 갖고 있지 않은 물건을 사야 할 때에는 값을 깎지 않는 법이다.
“싸고 비싼 것을 다투지 않고 한번 사기로 값을 정하였으면 아무리 싼 것이 있더라도 그것을 버리고 다른 것을 사지 말고, 다른 이가 흥정하거든 피하여 살 것이며 부처님께 공양하는 꽃은 잘 핀 것을 택하되 냄새를 먼저 맡지 말며, 시든 것은 골라내고 새 것을 공양하며 시든 것은 땅에 밟게 하지 말고 한쪽에 버려야 한다.”(사미율의)
3.3.3. 공양을 올릴 때 정중하고 조심스레 올린다.
공양물을 불전에 올릴 때는 정중하고 조심스레 올려야 한다. 두손으로 받쳐서 이마 위로 올려야 하니 잘못하여 눈과 코와 입에서 부정한 것이 떨어질까 조심하여서다.
공양물을 담는 그릇도 깨끗이 할뿐만 아니라 집고 놓음에 안전하게 하며 함부로 하여서는 안된다. 만일 두 손으로 받들기에 어려운 높은 곳이나 먼 곳이어서 한 손을 쓸지라도 다른 손으로 또 한 손을 받쳐들어야 하는 것이다.
3.3.4. 의식(儀式) 중엔 법대로 해야 한다.
의식을 할 때는 혼자 할 때나 스님과 더불어 여럿이 함께 할 때나 여법(如法)하게 행해야 하니 절을 해야 할 때에 앉아 있거나 조용히 축원할 때에 돌아다녀서는 안된다.
잘 알지 못하는 일은 스님께 여쭈어 보고 또한 스님이 하시는 대로 함께 따라서 하면 제일 무난한 일이다. 스님이 일어설 때에 일어서고 예배드릴 때 예배하며 정진할 때에 함께 염불을 드리면 된다.
특히 축원을 올릴 때 마음을 다른 데 두어 산란하거나 잡생각과 행동으로 일심을 잃어서는 안된다. 또한 의식이 모두 끝나기 전에 혼자 나가버리는 일도 삼가하여야 할 것이니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이 여일하니 마음을 쏟아야 할 것이다. 불공을 올리는 일이 모두 끝나게 되면 다시 부처님과 스님께 합장 인사하여 감사의 뜻을 표하여야 한다.
3.4. 법회에서 설법을 들을 때
3.4.1. 몸과 마음을 단정히
우리는 불교를 알고자 할 때 스님을 찾아 뵙고 설법을 듣게 된다. 설법을 들을 때는 혼자 들을 때도 있고 또 대중이 모여 함께 듣는 법회에 나가 들을 때도 있다.
법을 듣는다는 것은 불교를 배우는 데 가장 첫걸음이 되는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법을 들을 때는 『모름지기 잘 들어서 생각하고 생각하여서 닦아 행하라. 이것이 세 가지 지혜니라(須聞而思 思而修 是三慧也;수문이사 사이수 시삼혜야)”라 한다.
나아가 말 구절만을 기억하여서 이야기 거리로 삼아서는 안되고, 알지 못하면서 아는 척하여 귀로 듣고 입으로 흘려 버리면 안된다고 경계하신다.
설법을 잘 듣기 위해서는 먼저 그 몸과 마음이 단정해야 하고 예의범절이 있어야 한다.
먼저 법문을 듣고자 할 때에는 의복을 단정히 하고 공경스럽게 삼배(三拜)를 드려 설법하시길 청해야 한다.
설법을 들을 때에는 단정히 앉아서 두리번거리거나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지 말고 큰기침이나 소리를 내지 않으며 다른 사람과 소근거리지 않으며 손이나 발로 딴 짓을 하여서 마음을 다른 곳에 두어서는 안된다. 오로지 법문의 뜻이 무엇인가 귀기울여 경청할 것이요, 또한 깊이 생각하고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또한, 법문을 들을 때는 가지고 있는 염주나 단주를 굴리는 일도 삼가하여야 할 것이다.
3.4.2. 늦게 참석하였을 때
혹시 법회에 갔을 때 늦게 참석하여 이미 법회가 시작되었으면 다른 사람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살며시 자리잡고 앉아야 한다.
이 때에는 향을 사르거나 촛불을 켜거나 또 큰절을 한다하여 앞에 나가 번잡하게 해서는 안되고 오로지 묵례하고 가만히 참석하였다가 법회가 끝난 뒤에 하는 것이 좋다.
또한 설법 도중에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나가는 것은 큰 실례이며 부득이 피치 못할 일이 있을 때는 미리 맨 뒷자리에 앉았다가 다른 사람에게 폐가 되지 않도록 살며시 일어나야 한다.
설법을 들을 때 마음가짐으로 두 가지를 경계하라는 가르침이 있다.
“절벽에 부딪힌 것과 같이 어렵다는 생각을 내어서 물러날 마음을 갖지 말며, 흔히 들은 말이라 생각하여 용이하다(쉽다)는 마음을 내지 말고 모름지기 생각을 비우고 들어야 한다.”
또 설법하시는 스님을 가벼이 생각하면 나아갈 바가 없고 얻는 것이 없게 되는 것이라 비유하여서 “어떤 사람이 밤중에 길을 가는데 죄인이 불을 밝혀준다 하여 그 불빛을 받지 않으면 구렁에 떨어지리라.”하시는 말씀도 있다.
설법을 들을 때는 마치 살얼음을 밟듯이 눈과 귀를 기울여서 들어야 한다.
설법이 끝나면 감사의 예를 드리고 조용히 일어나 물러나와야 한다. 만일 의심스러운 일이 있으면 스님에게 다시 물어보아도 상관없으나 스님의 형편과 시간을 존중해서 무리하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
3.5. 스님을 대할 때의 예절
3.5.1. 스님을 부를 때
법명과 법호
스님은 이름이 여럿 있다. 출가하기 전의 이름은 속명(俗名)이요, 출가하여 계를 받고 득도하면 법명(法名)이 있게 된다. 스님을 부를 때는 속명을 쓰지 않고 법명을 부르게 된다. “○○ 스님”
출가한지 오래되어 모든 경전을 배우고 도가 깊어져 능히 남을 가르칠 수 있고 불법을 펼 만한 스님이 되었을 때는 큰 스님으로부터 인가(認可)를 받고 법을 전해 받게 된다. 이 때를 입실(入室).건당(建幢)이라 하며 법맥을 상속(法脈相續)한다고 한다. 이때 당호(堂號) 또는 법호(法號)를 받게 된다.
법을 이어받아 법호를 얻으신 스님에게는 법명을 부르지 않고 법호를 불러야 하는 것이 예의다. 그러나 스님 본인은 겸손하고 사양하여 법호가 있으면서도 법명으로 칭하나 다른 분이 부를 때는 꼭 법호를 사용하여야 하는 것이다.
소임과 별칭
스님들에게는 각기 절에서 맡은 바 직책이 있다. 그 절의 모든 운영을 책임한 주지(住持) 스님, 모든 대중들의 수행과 위의와 법도를 지도하시는 조실(祖室) 스님.방장(方丈) 스님, 법문을 설하여 주시는 법사(法師) 스님, 경을 가르치시는 강사(講師) 스님, 또 주지 스님 아래서 일을 보는 총무 스님, 교무 스님, 재무 스님, 절 살림을 맡아 하는 원주 스님, 법당에서 부처님을 받들며 공양을 올리는 부존 스님 등 각기 스님에게 부여된 직책이 있다. 이때에는 법호가 있다 하여도 직책을 붙여서 조실 스님, 주지 스님, 부존 스님 등으로 부르게 된다.
큰스님의 법명을 부르지 않고 법호나 당호로 불러야 하지만 법호를 함부로 부르는 것도 송구하기 때문에 따로 호칭(呼稱)하는 것이 더 좋은 예의(禮義)다.
예를 들면 큰스님이 계신 곳의 이름을 붙여 ○○산 큰스님, ○○사(암) 큰스님 등 산 이름이나 절 이름으로 대신하기도 하고 또 그 스님이 계신 건물의 이름을 따라서 ○○실 스님, ○○당 스님, 별당(別堂) 스님 등으로 호칭하기도 한다. 방장 스님이나 조실 스님은 ○○ 큰스님이라 하며 나이 많으신 원로 스님들께는 꼭 노(老)자를 붙여 ○○ 노스님이라 하는 것이 예의가 된다.
3.5.2. 스님에게 예배할 때와 하지 않을 때
스님을 만나게 되면 반드시 합장하고 예를 드린다. 밖에서 만났을 때는 그대로 서서 합장 반배도 좋으나 방 안에 들어가면 다시 합장하고 오체투지의 큰 절을 한다.
설사 밖에서 인사를 했다 할지라도 스님이 자리에 좌정하시게 되면 다시 큰절을 하는 것이 예의다.
또 법문을 청할 때는 큰절로 삼배하며 법문이 끝나거나 예식이 끝났을 때도 은혜에 감사하는 예를 드려야 한다.
스님을 만나 예배를 하지 않아야 할 때가 있다. 스님이 좌선하여 정(定)에 들었을 때, 스님이 공양할 때, 스님이 설법할 때, 스님이 세수하고 양치할 때, 스님이 목욕하거나 누워서 쉴 때, 화장실에서 만났을 때는 절을 하지 않아야 한다. 다만 묵례로써 공손한 태도만 보이면 될 것이다. 스님이 답례를 하려면 하던 일을 멈추거나 번거롭게 되기 때문이다.
3.6. 공양(식사)할 때의 예절
예로부터 사람이 식사하는 모습을 보고 ‘복스럽게 먹는다.’ 또는 ‘식복(食福)이 있겠다.’고 말해오고 있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사는 곳과 풍습에 따라 각기 식사하는 법이 다르지만 공통적인 것은 식사할 때도 분명히 예절이 있고 그 예절에 따라야 대접을 받게 된다.
3.6.1. 발우 공양
절에서 스님들이 공양하는 것은 원칙으로 ‘발우 공양’이다. 발우 공양이란 각기 자기의 음식 그릇인 발우(바릿대)를 가지고 여기에다 자기가 먹을 음식을 받아먹고 씻어서 지니는 것이다. 요즈음 서양식인 ‘부페’와 식당에서 주문 식단제의 원천 같은 방식이다.
발우 공양의 특징은 자기가 먹을 수 있는 만큼의 음식을 자기 그릇에 담아 먹고 남기지 않으며 다른 음식에 함부로 손을 대어 지저분하지 않게 하는 가장 위생적인 방법이라 할 것이다.
또 음식에 탐을 내어 혼자만 많이 먹으려는 과욕을 부리지 않고 골고루 나누어 먹는 평등 공양이라 할 것이다.
3.6.2. 다섯 가지 생각
절에서는 스님들에게 공양할 때의 예절을 강조하여 가르치신다. “공양 시간이 되면 의복을 단정히 하고 음식을 받을 때는 차례를 넘지 않게 하며 적지도 않게 자기가 먹을 만큼 받아야 하며 만일 음식을 다 먹지 못하겠다 하면 미리 덜어내야 한다. 또 음식을 먹기 전에는 다섯 가지를 생각하고 염불을 해야 한다.”
‘이 음식이 내가 먹게 될 때까지는 얼마나 많은 수고와 노력이 들었겠는가?’
‘나의 덕행(德行)은 공양을 받음에 부족함이 없는가?’
‘이 공양을 받으며 탐욕심을 일으킴이 없는가?’
‘이 공양은 내 몸을 유지하는 약으로 생각하고’
‘이 공양을 받음은 오직 불도를 이루려함이다.’ 하고 오관게(五觀偈)를 하는 것이다.
3.6.3. 음식은 소중하게
“받은 음식을 좋다 나쁘다 가려서는 안되고, 먹고 마심에 씹는 소리, 훌쩍거리는 소리를 내어서도 안되고, 밥을 먹으면서 말해서도 안되고, 혹시 벌레나 티끌이 들어있어도 살며시 혼자만 알지 다른 사람에게 말하여서는 안되고, 한 자리에서 먹고 자리를 옮겨 다니며 먹지 말고, 그릇을 부딪히거나 긁는 소리를 내지 말며, 음식을 먹고 난 뒤 찌꺼기를 남기지 말고 깨끗이 먹어야 한다.”
이와 같이 자세하게 음식 먹을 때의 예절을 가르치고 있다. 음식을 소중히 하여야 한다고 강조하는 가르침으로 ‘한 알의 곡식도 소홀히 버려서는 안되니 만일 한 알의 곡식을 버리게 되면 곡식이 다 썩어 없어질 때까지 합장을 하고 서 있어도 그 과보를 면하기 어렵다.’고 한다.
3.6.4. 일체 만물에 은혜와 감사를
우리의 생명을 이어주는 모든 음식이 우리와 같은 생명을 가졌던 것. 설사 식물이라 할 지라도 한 방울의 물이라 할 지라도 같은 생명인줄을 깨닫게 하는 첫걸음이 되기 때문이다. 절에서 스님들에게 가르치고, 스님들이 행하는 공양법을 재가 신도들도 참작하여 따르는 것이 또한 절에서의 예절일 것이다.
공양이 끝나면 꼭 합장하고 일체 만물의 은혜와 감사한 마음을 가지는 예를 표해야 한다.
4. 제장; 佛像(불상)
절에는 여러 부처님을 모셔놓은 갖가지 집들이 있다. 이 부처님들을 우리는 통칭해서 불상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러한 불상들은 나름대로 각기 교리적 배경을 갖고 있는데, 이것을 佛格(불격) 또는 덕이라고 한다.
불상은 깨달은 이 즉, 覺者(각자)로서의 격을 갖추고 있는 부처님을 형상화시킨 것이다. 대승 불교에서는 누가나 다 부처가 될 수 있고, 또 어느 때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입장이기 때문에 과거, 현재, 미래를 막론하고 수많은 부처님이 계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석가모니불을 비롯하여 비로자나불, 아미타불, 약사불, 미륵불 등과 53불 1천불상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4.1.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석가모니불은 불교를 창시하신 교주이시다. 대승 불교시대(BC 1세기경 이후)에 들어와서 다양한 부처님이 예배되고 불상 또한 다양하게 만들어지지만, 불교의 창시자이자 교주인 석가모니불이 가장 숭앙 받았으며 따라서 어느 시대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석가모니 불상이 가장 많이 만들어졌다.
우리 나라의 석가모니 불상은 초기에는 서 있는 입상(立像)일 경우 시무외.여원인(施無畏.與願印; 오른 손을 들어 손바닥을 보이면서 손가락을 위로 펴고, 왼손은 아래로 내려 손바닥을 밖으로 보이는 손가짐)의 수인(手印)을 지으며, 앉아 있는 좌상(坐像)을 경우에는 선정인(禪定印; 왼손 위에 오른손을 놓고 엄지를 맞대는 모양)의 수인을 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통일신라 시대 이후 특히 조선 시대에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오른 손을 무릎 아래 쪽으로 향하게 하는 모양)을 하는 것이 거의 통례였다.
대웅전(大雄殿)에 주불(主佛)로 봉안되며, 응진전, 나한전, 영산전, 팔상전 등에도 주불로 봉안되는 경우가 많다.
협시보살상은 문수(文殊) 보살상과 보현(普賢) 보살상이 좌우에 배치되거나 관음보살상과 허공장보살상, 또는 관음이나 미륵 보살상도 배치된다.
4.2. 비로자나불(毘盧{辶+ 蔗}那佛)
현상계에 나타난 부처님의 원래 모습인 진리 자체를 상징하는 부처님이 비로자나 부처님, 즉 대일여래(大日如來)다. 그래서 진신(眞身) 또는 법신(法身)이라 말하고 있다.
비로자나(Vairocana)는 변일체처(遍一切處) 또는 광명변조(光明遍照), 즉 불의 광명이 어디에나 두루 비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비로자나 부처님은 진리의 몸이 온 누리에 두루 비치는 큰 빛을 내어 모든 이들을 이끌어 주시는 부처님이다.
그래서 이 불상이 봉안된 불전을 대광명전(大光明殿), 대적광전(大寂光殿)등으로 부르는 것이다. 이러한 불전에는 비로자나불을 본존(本尊)으로 하고 좌우에 문수, 보현 보살이 협시하는 경우가 많지만 불전이 클 경우 좌우에 報身(보신) 노사나불(盧舍那佛)과 응신(應身) 석가모니불이 협시하는 이른 바 삼신불(三身佛)을 모시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다.
이 불상은 화음경의 주존불(主尊佛)로 화엄종에서 주 예배불로 존중받아 크게 유행을 본 불상이다.
비로자나불은 지권인(智拳印)을 짓고 있는데, 신라 시대에는 주먹을 가슴에서 아래 위로 포개고 밑의 왼쪽 검지를 오른손 주먹이 감싼 모양이, 그리고 고려 후기에는 주먹쥔 왼손을 오른손으로 감싼 모양이 각각 유행되었다.
4.3. 아미타불(阿彌陀佛)
아미타(阿彌陀; Amitabha)불은 영원한 수명(無量壽;Amitayus)과 무한한 광명(無量光;Amitabha)을 보장해 주는, 즉 시간적이거나 공간적으로 영원한 부처님이라는 뜻인데 서방 극락정토를 주재하면서 뭇 중생들에게 안락과 수명을 보장해 주는 대자대비의 부처님다.
이 부처님은 먼 옛날 법장(法藏)스님으로 수행을 하시면서 48가지의 큰 서원(誓願)을 세워 훌륭한 나라를 실현할 것을 다짐하고 자신과 남들이 함께 성불하기를 원하여 극락정토를 이룩하신 부처님으로 이 세상의 괴로움 속에서 허덕이는 어떤 중생이거나 착한 일을 하고 아미타불을 지극정성으로 부르면 서방 극락의 아름다운 정토(淨土)에 이끌어 주시는 분이다.
아미타불의 형식적 특징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수인(手印)인데, 내영인(來迎印)을 하고 있다. 내영인은 오른손을 들어 부처를 보이고 왼손은 내려놓아 중생을 오라 하는 모습이다. 손가락을 엄지와 중간 손가락을 마주하도록 둥그렇게 하는 모습 등이 있는데 이것은 극락 세계를 표시하는 것이다.
극락 세계는 아홉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이를 구품연화대라 하고 상.중.하품에 따라 손가락을 엄지와 제1 손가락, 엄지와 중간 손가락, 엄지와 셋째 손가락을 서로 둥글게 하여 마주 대는 모습이다.
아미타불은 오랜 옛적 과거 세에 세자재왕불의 감화를 받은 법장(法藏)이 2백 10억의 많은 국토에서 훌륭한 나라를 택하여 이상 국토를 건설하기로 서원하고 48원(願)을 세워 자기와 남들이 다 함께 성불하기를 소원하면서 오랜 수행을 쌓고 성불하였으니 이 분이 곧 아미타불이시다.
협시보살은 좌우에 관음보살, 세지(勢至) 보살이 가장 보편적이며 관음 보살과 지장보살이 배치되거나 또는 4명씩의 8대 보살(관음, 세지, 문수, 보현, 미륵, 지장, 제장애, 금강장)이 배치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이 불상이 봉안되는 불전을 무량수전, 극락전, 아미타전으로 부르고 있다.
4.4. 약사불(藥師佛)
약사(藥師; Bhai sajyaguru)불, 약사 여래불은 동방 정유리 세계의 교주이시다.
이 부처님은 과거에 12대원을 발하여 이 세상 사람들의 온갖 아픔을 고쳐 주시고 사람들이 오래 살도록 해 주시며, 재난과 근심을 없애 주시고, 옷과 음식을 많이 주어 잘 살수 있도록 해 주시며, 부처님의 진리를 잘 실천하여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해 주시는 부처님이다. 약사유리광여래(藥師 璃光如來), 또는 대의왕불(大醫王佛)이라고도 한다.
약사불은 다른 불상과는 달리 왼손에 지물(持物)을 가진 계인(契印)을 짓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즉, 왼손에 약이 든 약합 같은 약그릇(藥器)을 들고 있는 것이다. 또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이 밖으로 향하도록 하고 다섯 손가락을 모두 펴는 시무외인(施無畏印)을 맺어 중생들의 두려움과 공포를 없애주고 안심을 주는 형상을 하고 계신다.
일광(日光)보살과 월광(月光)보살 또는 약사12지신상(藥師十二支神像)을 거느리고 있는 것 역시 특이한 점이다.
4.5. 노사나불(盧舍那佛)
깨달음을 얻기 위해 열심히 수행하신 공덕으로 나타나신 부처님으로 복과 덕이 가득하게 이 세상의 불쌍한 모든 사람을 구제하시는 부처님이다. 삼신불의 하나이신 보신불이라고도 한다.
4.6. 미륵불(彌勒佛)
메시아로서 널리 알려진 미래불(未來佛)이 곧 미륵불(Maitreya)이다. 자씨(慈氏)이며 이름은 아일다(阿逸多)라 하는데 인도의 바라내국 바라문 집에 태어나 석가모니불이 열반하신 후 56억 7천만년이 지나서 이 세상에 강림할 미륵은 현재는 도솔천 내원궁(內院宮)에서 보살로서 존재해 있으나 이미 수기를 받은 부처님이시다. 그러므로 미륵은 도솔천을 주재하고 그 곳에서 항상 설법하고 있는 입장으로 볼 때는 미륵 보살이라 함이 타당하고, 또 그의 하생(下生)의 입장에서는 이미 미륵불로 불려지게 된다.
사회가 불안할 때는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지상 낙원의 세계를 꿈꾸게 된다. 이러한 혁명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 알맞은 복음적인 부처님이 바로 미륵불이다. 후삼국 시대의 궁예가 스스로를 미륵이라 자칭한 것은 그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미륵불은 석가모니불이 미처 제도하지 못한 중생들을 모두 구제하기 위하여 용화수라고 해서 이 불이 봉안된 불전을 용화전(龍華殿)이라고 부른다.
4.7. 연등불(燃燈佛)
연등불(Dipamkara)은 과거 머나먼 옛적에 출현하여 현재의 석가모니불에게 미래 세에 반드시 성불하여 호를 석가모니라 할 것이라는 수기(授記)를 준 부처이시다. 정광여래(錠光如來) 또는 정광불이라고도 한다.
이를 음역하여 제화갈라(提和竭羅)라고 하며 또는 보살의 칭호를 붙여 제화갈라보살, 갈라보살 이라고도 한다. 즉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하는 경우 좌우의 보처불(補處佛)로서 과거불인 제화갈라보살과 미래불인 미륵보살을 등장시키기도 한다. 이 들 중 석가모니불 다음 세상에 부처가 될 분이 미륵이므로 과거 현재 미래의 3세불(世佛)로서 등장되는 것이다.
5. 제장; 보살
보살은 보리살타(菩提薩陀; Bodhisattva)의 준말로서 覺有情(각유정), 大士(대사), 高士(고사), 개사(開士) 등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보살 즉 각유정이란 뜻 속에는 세 가지 해석이 있다. 그 처음은 ‘깨친 중생’ 둘째는 ‘깨치게 하는 중생’ 그리고 세 번째는 ‘깨칠 중생’이 그것이다.
즉 중생은 중생이로되 이미 불법의 진리를 깨친 중생으로 하여금 깨치도록 유도하는 중생, 그리고 그와 같은 보살과 같이 우리들도 앞으로 깨치게 될 부처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중생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보살은 대승사상에서 유래되는 것으로서 위로는 보리 즉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는 이른바 대승의 이상적 인간상이다. 그러므로 대승경전에는 무수한 보살들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5.1. 관(세)음(觀(世)音) 보살
관(세)음 보살은 광세음(光世音), 또는 관자재(觀自在) 보살이라고도 하나, 중생의 모든 괴로워하는 소리를 듣고 그 괴로움을 없애준다는 뜻에서 관세음(觀世音)이라는 호칭을 즐겨 사용하고 있다.
인도 범어로 아발로키데스바라(Avalokitesvara)라는 말을 번역한 말이다. 관음은 세상의 모든 소리를 관한다는 말로 이 세상 모든 중생의 온갖 고뇌의 소리를 다 들으시고 관찰하여 아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관세음 보살은 아미타불을 받들고 계신 분으로 중생에게 온갖 두려움이 없는 무외심(無畏心)을 베풀어주는 분이라 하여 시무외자(施無畏者)라고도 하고 대자 대비를 본원력으로 하시는 분이기에 대비성자(大悲聖者)라고도 한다.
관음 보살은 아미타불을 대세지 보살이나 지장보살과 함께 협시하는 경우가 가장 많고 그 외에 석 가불의 협시 보살로서도 표현된다.
손에는 감로수(甘露水)의 정병(淨甁)을 지니는 것이 보통이며, 정병 대신 연꽃을 잡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머리의 보관 중앙에는 반드시 아미타불의 화신, 즉 화불(化佛)을 좌상 또는 입상으로 나타낸다.
이외에 백의관음(白衣觀音), 양유관음(楊柳觀音 = 水月觀音), 11면관음(十一面觀音), 성관음(聖觀音), 33관음(三十三觀音), 천수천안관음(千手千眼觀音), 마두관음(馬頭觀音), 준제관음(準提觀音), 여의륜관음(如意輪觀音) 등 헤아리기조차 어려울 만큼 다양한 관음이 있다.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는 각 중생의 수준에 알맞은 모습으로 변해서 제도(普門示現;보문시현)해야 하기 때문에 이렇게 다양한 모습의 관음 보살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5.2. 대세지(大勢至) 보살
대세지 보살은 줄여서 세지보살이라고도 하며 득대세지(得大勢至), 대정진(大精進)이라고 번역된다. 대세지란 말은 지혜광명이 모든 중생에게 비치어 3도(三途;지옥,아귀,축생)를 여의고 위 없는 힘을 얻게 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또한 대세지 보살이 발을 디디면 삼천 대천 세계와 마군(魔群)의 궁전이 진동하므로 대세지라 한다.
일반적으로 불교의 근본 대의를 자비와 지혜로써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불교를 간략하면서도 단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이다.
아미타불의 바른편 보처(補處) 보살로 이마 위에 보배병을 얹고 계신다.
따라서 아미타불에게는 자비문(慈悲門)과 지혜문(智慧門)이 있는데, 이 가운데 관음은 자비문을 대세지는 지혜문을 각각 표시함으로써 이 양대 보살이 불교의 내용을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보살이라 하겠다.
관음이 자비의 문으로써 중생을 제도한다면 대세지는 지혜의 문으로써 중생을 제도한다. 즉 세지보살은 지혜의 광명으로 모든 중생을 평등하게 비치어 지옥, 아귀, 축생의 삼악도를 여의게 하고 무한한 힘을 주므로 대세지라고 한다는 것이다.
관음보살이 머리의 보관에 아미타불을 나타내는 데 비하여, 대세지 보살은 아미타불의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머리의 보관내에 보배병을 나타내는 것이 특징이다. 손에는 연꽃을 들거나 합장을 하기도 한다.
연꽃의 의미는 중생이 본래 갖춘 불성(佛性)을 뜻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 꽃이 핀 것은 불성이 드러나서 이미 성불한 것을 뜻하며, 그리고 봉오리는 불성이 번뇌에 물들지 않고 장차 필 것을 나타낸다는 차이가 있다. 또 합장의 수인(手印)은 염불하는 수행자를 맞아 가는 것을 뜻한다.
5.3. 문수(文殊) 보살
문수 보살은 문수사리(師利) 또는 문수시리(尸利)라고도 표기되는 보살로서 묘덕(妙德), 묘수(妙首), 묘길상(妙吉祥)으로 번역된다. 즉 석가모니불의 왼쪽에 위치하여 석가불의 지혜를 상징하는데 머리에 5계(髻;상투)를 맺고 바른손에 지혜의 칼을 들고 왼손에는 꽃 위에 지혜의 그림이 있는 청련화를 쥐고 사자를 타고 있다. 이미 성불하여 용존상불(龍尊上佛).대신불(大身佛).신선불(神仙佛)이라 하며 또 미래에 성불하여 보견 여래(普見如來), 현재의 북방 세계의 환희장마니보적 여래라고도 이름하고, 오대산(청량산)에서 1만 보살과 함께 있다고도 한다.
문수 보살의 형태는 문수 5지(智)라 하여 5계(髻)를 맺어 있는 것이 보통이다. 이는 대일여래의 5지(智)를 상징하는 것이다. 대체로 조각상에서는 다섯 가닥으로 나타내고 있다. 또는 오른손은 지혜의 칼을 쥐거나 왼손으로는 푸른 연꽃을 지니기도 한다. 그 좌대(坐臺)는 연화대를 이용하기도 하지만 청사자(靑獅子)를 이용하여 이를 타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이 때에 부처님께서는 문수사리 법왕자를 칭찬하여 선재 선재라! 그대는 모든 보살 마하살을 위해 본업의 도(道)를 잘 설했노라.
여우는 사자의 종류가 아니고 등불이 해와 달 따를 수 없거니 시내에 큰 바다 담을 수 있으랴, 둔덕은 높은 산, 바다도 못보리법구름 온 누리 가득히 덮이니, 단이슬 초목을 흡족히 적시니 처음 보는 신통을 오늘날 보이어, 이르는 곳마다 중생을 건지네
중생이 평등을 배운다지만, 경계를 따라 마음이 물결치고 온 몸을 다 버린다해도, 미워하고 사랑하니 어찌 하리요, 그때 천여명 대중은 공중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며 보살이시여 저희들에게 평등한 법문을 일러주소서, 이 몸 다하도록 받들어 행하리이다. 궁중에서 또 게송으로 말하였다.
“마음을 땅처럼 가지고, 水, 大, 火, 風(지수화풍)대와도 같이 하나둘이 없고 분별이 없으면, 끝까지 허공 같으리.”
5.4. 보현(普賢) 보살
보현 보살은 문수 보살과 함께 석가모니 또는 비로자나불을 협시하는 2대 보살의 한 분이다. 문수 보살이 석가모니불의 지덕(智德)과 체덕(體德)을 맡음에 대하여 보현 보살은 석가모니불의 오른쪽에 위치하여 이덕(理德), 정덕(定德), 행덕(行德)을 맡고 있는 보살로 유명하다.
그러나 이 3덕 가운데에서도 가장 으뜸이 되는 것은 역시 행덕이다. 문수 보살이 대지(大智)의 상징이라면, 보현 보살은 대행(大行)의 상징이다.
대체로 보현 보살의 형상은 연화대 위에서 합장한 모습으로 나타나며 손에는 연꽃을 쥐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문수 보살이 사자를 타는 데 대해, 보현 보살은 코끼리를 타게 된다.
* 보현 보살의 열 가지 행원(行願)
1. 모든 부처님께 예경하며,
2. 모든 부처님 공덕을 찬탄하며,
3. 널리 공양을 닦으며,
4. 이제까지 지은 바 모든 죄업을 참회하며,
5. 다른 사람이 짓는 공덕을 함께 기뻐하며,
6. 부처님과 선지식(善知識)에게 설법해 주시기를 청하며,
7. 부처님과 선지식께서 세상에 오래 머물기를 청하며,
8. 부처님께서 닦으신 바 모든 행을 따라 배우며,
9. 항상 중생을 수순(隋順)하며,
10.지닌 바 모든 공덕을 일체 중생에게 회향(廻向)하는 것.
온법계 허공계에 무수한 시방세계
삼계의 한량없는 거룩한 부처님께
가여운 어린중생 삼업을 청정히해
한분도 남김없이 손모아 예배하니
한티끌 티끌속에 불국토 한량없고
한없는 불국토에 부처님 무수하고
가는곳 곳곳마다 부처님 회상인데
보리행 선양하심 청법함이 쉬임없네
거룩한 미타불께 수기를 받고나서
허공계 끝이오고 중생계 다한다면
한송이 연꽃위에 이내몸 태어나서
허넓은 시방세계 두루두루 다니면서
가겨운 뭇중생을 제도하기 쉬지않네
5.5. 지장(地藏) 보살
지장 보살은 지지(持地), 묘당(妙幢)이라고도 한다. 도리천에서 석가 여래의 부촉을 받고 매일 아침 선정(禪定)에 들어가 중생들의 근기(根機)를 관찰하며 석가모니불이 입멸한 뒤부터 미륵불이 출현할 때까지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사람, 하늘의 6도(六道)윤회에 끝없이 방황하는 중생을 구제해 주고, 지옥의 고통에서 허덕이는 중생을 인도하여 극락 세계로 이끌어 주는 보살이다.
지장 보살은 중생 제도를 위해 영원히 보살로 남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지옥문전에서 대비(大悲)의 눈물로써 교화한다는 보살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입멸한 뒤로부터 미륵 보살이 출현할 때까지 뭇 중생을 교화하는 분으로 도리천에서 석가여래의 부촉에 따라 매일 아침 선정(禪定)에 들어 중생의 근기를 관찰한다고 한다.
지장 보살의 형상은 머리를 깎은 민머리 아니면, 머리에 특수한 가운형 두건을 쓰고 있다. 가사(袈裟 ; Kasaya)를 입고 연꽃을 들고 있으며 또는 바른 손에 보배 구슬을 들기도 한다. 혹은 석장(錫杖)을 짚은 모습을 볼 수 있으며 동자(童子)를 안은 지장 보살도 있다.
한편, 지장 보살은 명부(冥府)를 주재하는 소위 시왕(十王)을 거느리게 하는 바 각 시왕이 주재하는 지옥은 다음과 같다.
제 1 진광 대왕 ; 도산(刀山) 지옥
제 2 초강 대왕 ; 화탕(鱯湯) 지옥
제 3 송제 대왕 ; 한수(寒水) 지옥
제 4 오관 대왕 ; 검수(劒樹) 지옥
제 5 염라 대왕 ; 발설(拔舌) 지옥
제 6 변성 대왕 ; 도사(毒蛇) 지옥
제 7 태산 부군 ; 대애(碓磑) 지옥
제 8 평등 대왕 ; 거해(鉅解) 지옥
제 9 도시 대왕 ; 철상(鐵床) 지옥
제10 오도전륜 대왕 ; 흑암(黑暗) 지옥
5.6. 제(諸) 보살
이외에도 수많은 보살들이 있어 팔만 사천 보살을 말하기도 하나, 우리 나라에서는 형상을 모시고 받드는 보살들은 대개 이상이라 하겠다.
천수경에서 나오는 천수 보살, 여의륜 보살, 대륜 보살, 관자재 보살, 정취 보살, 만월 보살, 수월 보살, 군다리 보살, 십일면 보살 등의 명호는 모두 관세음 보살의 덕화를 칭송하여 붙이는 이름들이라 하겠다.
인로왕(引路王) 보살.....
죽은 사람의 영혼을 맞아 극락 세계로 가는 길을 인도하는 보살이다.
일체청정대해중(一切淸淨大海衆) 보살.....
모든 보살을 통틀어 부를 때 쓰는 말이다.
6. 제장; 탱화(幀畵) . 괘불(掛佛) . 벽화(壁畵)
6.1. 탱화(幀畵;정화)
부처님이나 보살.성현들의 모습을 그린 화폭, 그림 족자를 탱화라고 한다.
부처님 상을 그린 것은 불 탱화(佛幀畵)인데, 불상(佛像) 뒤에 걸어 모시기 때문에 후불 탱화라고도 한다.
불 탱화에는 흔히 주불(主佛)과 삼존상(三尊像)을 그리고, 그에 따른 제자들 또는 모시고 있는 보살, 옹호하는 천황, 신장들을 함께 그려 장엄되어 있는 모습을 나타낸다.
예를 들면 영산 회상에서 설법하시는 모습, 극락 정토 세계의 모습, 지옥의 모습 등 진상(眞相)을 변하여 그림으로 그려서 변상도(變相圖)라고도하며 인도말로 『만다라』라 한다.
신중(神衆) 탱화는 부처님과 불법을 옹호하는 신장들의 모습을 그려 걸어놓은 족자를 말한다.
신중(神衆)은 대표적으로 화엄신중(華嚴神衆)을 말하는데 이는 화엄경에 나오는 104분의 성현.신장들로서 8금강 4보살 10대명왕.대범천왕.제석천왕.사천왕 등 각 천왕과 천자.호법선신 등이다.
이외에도 칠성 탱화.독성탱화.산신탱화 등이 있다.
6.2. 괘불(掛佛)
불상(佛像)을 그려서 걸 수 있도록 만든 탱화다.
불상이나 탱화는 보통 한번 봉안하게 되면 옮기기 어려움에, 법당 밖 야외에서 행사나 의식을 집행할 때에 걸어 놓을 수 있도록 만들이 진 것이 괘불이다.
괘불은 그 크기가 대단하고 또 장엄스럽게 그려져서 괘불을 모시고 열리는 불사는 대법회를 이루어 왔으며, 국보나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것도 많이 있다.
6.3. 벽화.단청(壁畵.丹靑)
법당 안과 밖의 벽에는 여러 가지 그림을 그린다.
벽화에는 부처님의 일생을 그리는 팔상성도, 설법하는 모습, 참선을 하여 자기 자신의 본래 성품을 찾아가는 모습을 비유한 십우도(十牛圖), 내려온 전설. 설화 등을 그린다.
절 건물의 기둥이나 벽과 천장, 반자에 갖가지 채색으로 장엄하여 그리는 것을 단청(丹靑)이라고 한다.
7. 제장; 법구(法具).불구(佛具)
종을 매단 곳을 종루 또는 종각, 북을 매단 곳을 고루 또는 고각이라 하는데 대개 절의 4물(四物; 범종, 법고, 운판, 목어)이 안치되고 있다. 이 4물중 범종은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위하여, 법고는 축생 계의 중생을 위하여, 목탁은 수중(水中)의 중생을 위하여, 운판은 공중(空中)의 날아다니는 중생을 위하여 울리게 된다고도 한다.
법구란 불법을 수행 정진하는 데 사용되는 법(法)의 도구라는 뜻이고, 불구는 부처님 주변에 사용되는 도구란 뜻이다.
7.1. 범종(梵鍾) 또는 인경
범종은 절에서 쓰는 종을 가리키며 순수한 우리말로 인경이라고도 하는데, 절에서 많은 사람을 모이도록 하거나, 모든 이들에게 때를 알려주는 종으로, 그 소리가 아주 신묘하여 예경이나 의식에도 쓰이게 되었다.
범종 소리는 우리의 마음속 깊이 울려 어리석은 몸과 마음을 자비하신 부처님의 품으로 이끌어 줍니다. 지옥에 있는 중생들을 위해 소리를 낸다고 한다.
본래 이 종은 불교가 중국에 들어온 후로 중국에서 예로부터 행하던 종과 인도의 건추(揵推;나무 조각을 마주쳐서 소리를 냄)에서 본받아서 만든 것인데, 대중을 모으기 위해서나 때를 알리기 위해서 치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점차 조석예경이나 기타 법요(法要)행사 때에 대중에 알리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종소리 자체에 신성한 뜻을 붙여서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큰 종을 종루나 종각을 짓고 달아두며 모양과 크기는 일정하지 않고, 종의 맨 윗부분은 용의 머리처럼 만들어 소리내는 음통과 거는 역할을 하는 용두(龍頭)가 있다. 상부에는 젖꼭지 모양의 유곽(乳郭)이 둘러싸 있고 아랫부분에 양편으로 상대해서 두개의 당좌(撞座)가 연꽃 무늬로 있게 되는데 종을 칠 때는 이 곳을 쳐야 한다. 또한 몸통에는 사보살상이나 아름다운 천녀가 악기를 연주하면서 하늘을 날아가는 모습을 한 비천상(飛天像)이 아름답게 새겨진다.
중생이 종소리만 들어도 번뇌가 없어지고 지혜가 자라나며 지옥에서 벗어나고, 삼계에 윤회하는 일도 없이 성불하여서 중생을 제도하게 될 것이다 하는 축원을 곁들이게 되었다. 과연 이 종소리로 하여금 듣는 자로 하여금 듣는 자의 마음을 맑게 하는 힘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이른 새벽 동이 트기 직전에 절에서 울려 퍼지는 그 우렁차고도 은은한 종소리는 중생의 혼미한 잠을 깨워주고 열띤 머리를 식혀주며, 불안한 가슴을 어루만져 주는 힘이 다분히 지니고 있다.
우리 나라의 종 가운데 모양이나 소리가 뛰어나게 아름다운 종으로 성덕 대왕 신종(별칭;에밀레종)과 오대산 상원사의 종이 국보로 지정되어 있을 만큼 극치를 이룬 범종이다.
7.2. 법고(法鼓) 또는 홍고(洪鼓)
절에서 아침 저녁으로 예불할 때와 의식을 치를 때 치는 큰 북이다. 북소리가 널리 퍼져 나가는 것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이 널리 퍼져서 모든 이에게 언제나 참다운 이치를 전하여 준다는 뜻이 있으며, 짐승 세계의 중생들을 위하여 소리를 낸다고도 한다.
불법(佛法)을 북에 비유한 것, 법을 말하는 것을 법고를 울린다고 말한다. 이 소리가 널리 퍼지는데 비유 또 교법이 중생의 번뇌를 없애는 것이 마치 진치고 있는 군대들이 전진하라는 북소리가 울리면 적군을 무찌르는 데 비유, 우리 불자도 용맹스러이 정진하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법고는 아침 저녁 예불 때와 상당(上堂) . 소참(小參) . 보설(普設) . 입실(入室) 등의 법요 의식에 쓰인다.
7.3. 목어(木魚)
나무를 잉어모양으로 만들어 속이 비게 파낸 것으로 아침 저녁으로 예불할 때와 경전을 읽을 때 두드리며 "방"이라고도 한다.
물 속에서 살고 있는 모든 고기들을 위하여 소리를 내는 것이라고 한다.
7.4. 운판(雲板)
청동으로 된 판을 구름모양으로 만든 것을 말하며 재당(齋堂)이나 부엌에 달고 대중에게 끼니 때를 알리기 위해서 사용하고, 허공에 떠돌아다니는 모든 것들의 괴로움과 아픔을 덜어주기 위해 치는 물건이기도 하다.
죽이나 밥을 끓일 때 세번 치므로 화판(火板)이라 하며, 끼니 때에 길게 치므로 장판(長板)이라 하며, 구름 모양의 형상을 한 것은 구름은 비를 머금고 있기 때문에 불을 다루는 부엌에 매달아 놓음으로써 화재를 막는다는 뜻이 있기도 하다.
7.5. 목탁(木襗)
절에서 사용하는 법구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또 제일 많이 사용되는 것이 목탁이다.
위의 목어에서 발전된 둥근 모양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염불, 독경, 예배를 할 때, 그리고 공양을 하거나 여러 사람을 모을 때에도 쓰며, 어리석음을 깨우친다는 뜻으로 쓰인다.
옛날 어느 절에 덕 높은 스님이 몇 사람의 제자를 가르치고 있었다. 한 제자는 어긋난 속된 생활을 일삼다가 그만 몸쓸 병이 들어 죽었다. 하루는 스승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는 데 등위에 커다란 나무가 달린 고기가 뱃전에 머리를 들이대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스승이 깊은 선정(禪定)에 잠겨 고기의 전생을 살펴보니 이는 바로 병들어 일찍 죽은 자기 제자가 생활의 과보로 고통받는 모습이었다. 이를 알고 가엾은 생각이 들어 수륙 천도제를 베풀어 고기의 몸을 벗게 하여주었다. 은혜를 감사해 등에 있는 나무를 베어 고기 모양을 만들어 스님 앞에 두고 쳐주기를 부탁하는 것이었다. 그 소리를 들으면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교훈이 될 것이고 물의 고기들을 해탈할 인연이 되겠기에...... 이것이 차츰 쓰기에 편리한 목탁으로 변형되었다.
7.6. 법상(法床) . 경탁(經卓)
법당 안에는 법상과 경탁이 있다.
법상은 설법할 때에 법사 스님이 앉으시는 높고 큰 상을 말합니다. 보통 사자좌(獅子座)라 하여 부처님이 앉으시는 상좌에 비유하여 말한다. 이는 부처님은 사자와 같이 위대한 분이시며 부처님 말씀은 사자후(獅子吼)처럼 모든 소리를 제압하는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에 불법을 전하는 설법 자리를 사자좌로 비유한 것이다.
경탁은 경전을 올려놓는 탁자다. 불경을 독송할 때는 탁자 위에 바쳐 올려놓기에 경탁이라고 한다.
7.7. 경쇠
인도에서는 건추(健推)라 하는 것을 종(鍾) 또는 경쇠로 변역 하였다. 경쇠는 종의 종류이나 작은 것으로 주발 그릇과 같이 만들어 복판에 구멍을 뚫고 자루를 달고, 쳐서 소리를 내는 불전의 기구다.
법식을 행할 때 부전 스님이 쳐서, 대중이 일어서고 앉는 것을 인도하며 또 공양을 할 때에 심경(心經)을 독송하며 사용하기도 한다.
본래 돌로 만들었으나 지금은 놋쇠로 흔히 만들고 노루 뿔 따위로 치게 되면 소리가 잘 난다.
7.8. 동라(銅羅)...태징
법회 때 쓰는 악기로 흔히 놋쇠로 만들어 대야와 같이 둥글게 하고 테두리 한 곳에 끈을 매어 손으로 들고 채로 복판을 친다. 속어로 태징 또는 징이라고 한다.
7.9. 바라...동발(銅鈸).요발(鐃鈸)
이를 또 동반(銅盤)이라 하고 발(鈸)이라고도 하는데 금속으로 만든 편편한 접시 모양 같은 것이다. 두개로 되었고 각각 중앙에 끈을 달아 좌우 손에 한 개씩 들고 서로 비벼 쳐서 소리를 낸다. 본래는 요와 발 두 종류의 악기이던 것이 합쳐서 하나로 된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흔히 바라라고 하며 이 바라를 치면서 춤을 함께 추는 바라춤은 불교 의식의 장중함을 더해 준다.
7.10. 다기(茶器)
부처님 앞에 깨끗한 맑은 물을 올리는 그릇을 말한다. (불가에서는 아침은 다기를 올리고 저녁은 향을 사른다)
일심청정 감로수 올리오니, 우러러 삼보님전 감응하소서 !모든 병과 모든 액난 소멸하옵고, 저의 정성 자비로서 거두소서.
7.11. 죽비(竹篦)
대나무를 두 쪽으로 갈라지게 만든 것으로 손바닥을 쳐서 소리를 내어 참선의 입정과 출정을 알리기 위해 세번 친다.
길이가 한자 반쯤이나 되는 대나무나 나무를 2/3쯤은 가운데를 타서 두 쪽으로 갈라지게 하고 나머지는 자루를 만들어, 오른손에 쥐고 왼손 바닥에 쳐서 소리를 내어, 대중의 안고 일어섬을 지도하는 법구다.
장군죽비라고 하는 대형 죽비가 있어 대중이 모야 참선을 할 때 졸음을 쫓는 도구로 사용한다.
7.12. 요령(鐃鈴. 搖鈴)
절에서 의식을 치를 때 오른손으로 잡고 흔드는 놋쇠로 만든 작은 종 같은 물건이다. 염불 의식 절차에 요령을 잡은 사람이 법주가 되고 목탁을 잡은 사람이 바라지가 된다. 법주란 의식 절차를 주도한다는 뜻이다. 요령 사용법에는 일자 요령, 심자(心字)요령, 상하 요령이 있다.
경을 독송할 때 사용하며 특히 밀교에서 진언 다라니를 외울 때 쓰는 것으로 자루를 금강저 모양으로 오고를 한 오고령(五鈷鈴)이 있다. 방울 같은 종을 흔드는 것이라 하여 요령(搖鈴)이라 하기도 한다.
“요령소리 울리어서 두루 청하니 자비광명 비추는 곳 연꽃이 피고 지혜눈 이르는 곳 지옥 없어라, 중생들이 찰라중에 성불하도다.”
7.13. 법라(法螺) . 패(唄)
소라 고동에 금속으로 부는 것을 만들어 경행(經行) 시에나 법회 때에 이것을 불어서 대중을 모이게 하고 의식을 행하는 악기 종류다.
7.14. 천개(天蓋)...닷집
부처님 상(佛像)을 덮는 일산(日傘)이나 우산(雨傘)과 같은 것이다. 처음에는 비나 먼지 같은 것을 막는다는 뜻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법당 안에 있는 탁자 위를 덮을 수 있도록 한, 닷집으로 되어 있다.
본래는 천으로 만들었던 것이나 후세에 와서 금속이나 목재로 조각하여 만든 것이 많으며, 고전 양식의 법당처럼 포를 얹은 지붕 형태를 만들어 법당 천정에 달아 놓거나 또는 긴 장대 끝에 매달아 세워 놓기도 한다.
고대 인도어로는 Chattra라 하여 비나 햇빛을 가리기 위하여 대나무 껍질.나뭇잎 등으로 만들어 부처님께서 거동을 하시거나 법문을 하실 때 받쳐들고 부처님을 비나 햇빛으로부터 가려 드린 것에서부터 비롯된다. 지금은 불상 위에 뿐만 아니라 법사 스님이 설법하는 법상 위에 달기도 한다.
7.15. 당(幢).번(幡)...보상개
장대 끝에 용머리의 모양을 만들고 비단 촉으로 깃발을 달아 드리운 것으로 불.보살님의 위신력과 공덕을 표시한 장엄구(莊嚴具)로 불전이나 불당 앞에 세우는 것을 당(幢)이라 한다.
당(幢)에는 중생을 지휘하고 모든 마군이들을 굴복시키는 표시라는 뜻도 있다.
번(幡)도 역시 깃발을 드리운 것으로 불 보살님의 위력을 표시하는 장엄 도구이며 이를 만들어 달고 복을 빌기도 한다. 또, 번(幡)은 정(定)과 혜(慧)의 손을 본뜬 것이라고도 하며 또 사바라밀(四波羅密)...상(常) 락(樂) 아(我) 정(淨)의 발을 본뜬 것이라고도 한다.
지금은 당과 번을 합하여 당번이라 하며 우리 나라에서는 보상개, 보산개라고도 부른다.
7.16. 화만(華鬘)...꽃다발
꽃다발을 화만이라고 하는데, 많은 꽃을 실에 꿰거나 묶어서 장식으로 하는 것이다.
본래 인도에서는 사람들이 목에 걸거나 몸에 장식하는 꽃다발.꽃목걸이 였는데 스님들이 이것으로 몸에 장식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아, 방안에 걸어 두거나 부처님께 공양하는 데 쓰인다.
화만을 만드는 꽃은 일정하지 않고 주로 향기가 많은 것을 골라 꾸몄는데 후세에 와서는 금속으로 만든 꽃으로 장식하게 되었다.
7.17. 연화대좌(蓮華臺座)...화대.연대.연화대
불보살님을 모시는 자리를 연꽃의 모양으로 조각을 하여 연화좌.연화대좌라고 한다.
연화대에 모시는 것은 연꽃이 진흙 속에서 나서 꽃을 피우지만 조금도 더러움이 물들지 않은 덕이 있기 때문이며 불보살님은 깨끗하지 못한 더러운 국토에 있으면서도 세상의 풍진을 여의고 청정하여, 신력이 자재한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연화 자리를 만드는 것이다.
8. 제장; 승물(僧物)...스님들이 사용하는 물품
8.1. 가사(袈裟)...법복(法服)
8.1.1. 삼의일발(三衣一鉢)
수행하는 스님들의 의식주의 일상 생활에 필요한 소유물을 부처님 당시에는 삼의일발(三衣一鉢)로 표현하였다.
삼의일발이란 세가지 옷과 발우(음식 담는 그릇) 하나이니 겉옷, 중간옷, 속옷의 세 가지면 의(衣) 생활이 만족되고 발우 하나면 식(食) 생활이 충분하며, 주(住) 생활은 나무 밑이나 바위 위면 되니 따로이 필요 없다 한 것이다.
그 뒤 여러 사람이 모여 대중을 이루게 됨에, 여기에 약간의 필수품이 첨가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어서도 불법을 전할 때에 깨달은 바 마음으로써 전하지만, 그 표시로써 전법게(傳法偈...법을 전하는 게송 법구)와 더불어 의발(衣鉢)을 전수하는 것으로써 신물(信物)을 삼아 왔으니 스님들에게 의발(衣鉢)은 가장 중요한 소유물이 되는 것이다.
스님들의 옷을 인도에서는 가사(袈裟 Kasaya)로 통칭하고 있으나 중국에 와서 도복(道服)이라 흔히 부르고 있다.
가사란 범어(인도 고대어)로 ‘가사야’를 음역한 것이고 적색(赤色). 부정색(不正色). 염색(染色)이라 번역한다. 가사는 부처님께서 입으시는 옷인데 뒤에는 스님들이 입는 법의 세 가지를 말하게 되었다.
삼의(三衣)란 상의(上衣-승가리). 중의(中衣-울다라승). 하의(下衣-안타회) 세 가지인데, 그 중에서 상의인 승가리를 법의(法衣)라 하여 가사의 대표로 삼는 것이다.
8.1.2. 가사가 지니는 열두 가지 이름
사바 세계의 여러 가지 티끌(六塵)에 물들지 않고 멀리 여윈 사람의 옷이란 뜻............ 이진복(離塵服).이염복(離染服)
불도를 수행하는 사람의 옷......................... 도복(道服)
세간의 모든 얽매임 떠난 사람의 옷..... 출세복(出世服)
진리인 법에 어긋나지 않는 여법(如法)한 수행인의 옷
............................... 법의(法衣)
모든 번뇌를 털어버리는 덕이 있는 옷....소수복(痟瘦服)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연꽃이 더러움에 물들지 않음과 같아 가사도 .....................연화복(蓮華服).무구의(無垢衣)
인욕하는 갑옷 .......................인욕개(忍辱鎧)
자비를 행하는 이의 옷 ....................자비복(慈悲服)
다섯 가지 정색(靑黃赤白黑)을 피한 옷...간색복(間色服)
가사의 조각을 붙인 모습이 밭이랑과 같고 가사의 공덕이 마치 밭에서 곡식을 내는 것처럼 복밭이 되므로
............................복전의(福田衣)
수행자가 덮는 윗옷 ....................와구(臥具).부구(敷具)
진리를 펴는 법의 옷 ..................가사(袈裟).법복(法服)
8.1.3. 가사의 종류와 색깔
상의인 승가리를 중의(重衣) 대의(大衣)라고도 한다. 조각 수에 따라 25조(條)부터 9조까지 9종(品)이 있어 스님들의 법계(法階)에 따라 입게 되는데, 제일 큰 대가사(25조)는 큰 스님께서 그리고 작은 가사(9조)는 이제 스님이 된 분이 착용하는 것이다.
가사 색깔은 정색을 피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데, 우리 나라에선 태고종과 몇 종단이 홍(紅) 가사, 조계종은 밤색 가사, 그리고 노란(黃) 가사를 입는 종단도 있으며, 중국 등에서는 노란 가사, 태국 등에서는 황갈색, 황적색 가사 등 차이가 있다.
장아함경에는 부처님께서 복귀(福貴)라는 신도에게서 두 벌의 황금 가사를 받아 여러 제자에게 보시하였다고 하고, 중국에 와서 가사가 홍 가사로 붉어진 것은 황제가 천자(天子)로서 태양을 상징하여 진홍 비단을 입었는데 부처님 제자인 스님은 법왕자(法王子)이니, 만천하의 스승이 된다 하여 대접으로, 붉은 바탕에 만 가지 수를 놓아 만수 가사(滿繡袈裟)를 지어드린 이후부터라는 설이 있다.
또 가사 끝에 천(天).왕(王)의 표시를 하고 해와 달을 상징한 금까마귀와 옥토끼를 수놓은 일월광(日月光)을 가사 중앙에 붙인 것도 이때부터라 한다.
8.1.4. 가사의 다섯 가지 공덕
가사에는 여러 가지 공덕이 있으나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전생에 “성불하였을 때는 가사에 다섯 가지 공덕을 갖추겠다.”는 서원으로 오덕(五德)을 갖추었다고 한다.
첫째, 크나큰 죄를 범하고 나쁜 사견을 가진 사람이라도 가사를 존경하는 마음을 내면 삼승(三乘)에 오를 것이요,
둘째, 천룡(天龍) 귀신 등이라도 가사에 공경심을 내면 삼승에서 물러나지 않게 하며,
셋째, 만약 귀신이나 사람이나, 가사 한 조각만 지녀도 음식을 충족케 하며,
넷째, 모든 중생이 서로 원수처럼 미워한다해도 가사를 생각하기만 하면 문득 자비심이 생기게 되며,
다섯째, 만일 전쟁터에서 가사 한 조각만 지녀도 목숨을 잃지 않게 하리라는 것이다.
가사는 크나 큰 복밭(福田)이 되는 것이다.
8.2. 장삼(長衫) . 승복(僧服)
8.2.1. 장삼(長衫)
①석가모니 부처님 당시
스님들의 법복(法服), 도복(道服), 하는 법의(法衣)가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에는 가사(袈裟)로 통칭되어 상의(上衣), 중의(中衣), 하의(下衣)의 세 가지로 천 조각을 여럿 합하여 꿰맨 것으로 몸에 둘러 감고 다녔다.
그러나 불교가 서역으로부터 동쪽으로 전파되고 특히 동북 아시아인 중국 대륙에 전래되면서 동북 지방의 기후와 생활 여건에 따라, 가사를 걸치는 것만으로는 생활하기에 어려운 형편이 되었다.
온대 지방에서 한랭 지방으로 전해진 불교가 불법을 펴는 승려, 성직자라 할지라도 지역의 기후와 풍토에 따른 변화가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②중국 대륙에서
중국 대륙에 와서 가사 밑에 입어야 하는 여러 가지 옷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우선 속옷이 따로 있어야 하고 또한 겉옷에 있게 되고 가사는 맨 위에 걸치는 법의(法衣)로써만 품격이 오르고 더불어, 일반 평상복에 가사를 입을 수 없다는 존엄함에 다시 다음의 법복(法服)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윗옷인 편삼(偏衫)과 아래 옷인 군자(裙子)를 합쳐 꿰맨 장삼이 예복으로 되었으니 중국에서는 이를 직철(直綴)이라 하였다. 직철은 본래 몸의 가운데에서 상,하를 관철한다 하므로 옷을 꿰매는 것이 위와 아래에 서로 통한다는 뜻이었다.
직철이 장삼으로써, 예를 갖추는 윗옷으로써 불전에 예배하고 법식을 행할 때에 입어졌으므로 법복이나 도복이라 불려졌다.
③우리 나라의 장삼
중국에서 우리 나라로 전래된 불교는 한국의 예복과 길을 같이하면서, 궁중 예복인 관대를 두르는 관복과 세칭 양반들이 입는 도포를 본뜬 예복인 장삼(長衫)으로 법복이 되었다. 그리하여 경건한 예식과 법회에서는 반드시 입어야 할 법의(法衣)로써 등장된 것이다.
그러나 근세까지 혼란이 없다가 해방 이후 현대에 들면서 다시 법복에 대한 정통 문제가 제기되었다.
일부에서는, 중국에서 입었던 법복을 따라야 한다하여 중국 장삼인 직철의 형태를 모방하여 윗옷 아래에 주름잡힌 천을 붙인 장삼을 보조장삼이라 하여 법복으로 착용하는 운동이 일었다.
한편으로는, 우리 나라 고유의 옷인 도포 형태의 장삼을 고수하여야 한다하여 두 갈래의 장삼 모양을 갖고 있었다. 장삼의 형태가 어떠한 형태이든 불교 고유의 법복이 아닌 점은 분명하고, 더불어 그 나라에 따라 법의가 만들어져야 할 것임에 전통적인 옷을 법복으로 삼아야 한다는 점에서는 생각해 볼 일일 것이다.
④팔대 장삼
장삼 중에 특히, 예식 중 경건하면서도 의식의 극치를 표하는 팔대 장삼이 있다. 이는 소매 자락이 땅에 끌리듯 늘어진 장삼이니 승무(착복)를 할 때 입는 법복이다.
8.2.2. 승복(僧服)
①치의 . 염의.....물들인 옷
승복이라 함은 스님들이 입는 옷을 모두 말한다. 승의(僧衣)라고도 하는데 본래는 가사만을 일컬었으나 흔히 스님들이 입는 일상 평상복인 한복 형태의 바지.저고리를 승복이라고 한다.
이는 다분히 우리 나라 옷의 모양인데 다만 물들인 옷감을 사용하여 치의(緇衣), 염의(染衣)라 한다.
회색으로 물들인 옷은 우리 나라 일반인이 입는 흰옷(백의 민족)에 대비하여 출가 수도인을 표시하고, 수도에 전념하기 위해선 옷을 빨거나 손질하는데 수공을 들이지 않는 옷이며, 또 곱고 화려한 색깔을 피한 잡색인 회색 옷(먹물 옷)이 세상의 오욕락을 초월하는 수도자다운 옷이기 때문이다.
②동방의
승복 중에 윗저고리가 반 두루마기와 같은 옷을 특히 동방의라 하니 이는 우리 나라의 옛 옷과 같은 형태다. 요즘은 스님뿐만 아니라 불교 신도들도 이 동방의를 입어 수행을 돕고 있다.
승복의 변천된 과정을 보며 지금 이 시대에 알맞은 승복은 어떻게 되어야 할 것인가? 일상복과 법복은 구분되어야 법답지 않을까 한다. 앞으로 더욱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8.3. 발우(鉢盂).....바릿대.....식기(食器)
8.3.1. 그릇 하나
발우란 인도말의 Patra로써 소리대로 발(鉢)이라 하였고 여기에 한문으로 그릇을 뜻하는 우(盂)를 덧붙인 것이다. 이를 또 소리대로 발우.바루.발다라.바릿대라 말하기도 한다. 뜻은 응기(應器), 응량기(應量器)라 한다.
응량기란, 양에 마땅한 그릇이니 먹을 만큼의 분량을 담는 그릇이요, 또 남의 공양을 받기에 마땅한 수행과 덕을 갖춘 성현(聖賢)이 사용하는 그릇이란 뜻이다.
나무를 대접 모양으로 깎아 만든 스님들의 밥그릇을 말한다. 발우에 밥이 담겨 있을 때는 많은 이들이 복이 가득 차 있고, 비어 있으면 온갖 괴로움과 헛된 생각을 비운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불자(佛子)가 공양을 할 때 먼저 합장하고 오관게의 뜻을 관하여 공양한다.
8.3.2. 오관게(五觀偈)
"이 밥이 올 때까지 공덕을 생각할 진데, 덕행이 부족한 나로써 먹기가 송구하다. 식사에 염탐하면 삼독도 구축되나니 생사를 멸하는 양약으로 생각하면서 도업을 이루기 위하여 이 밥을 먹노라."
8.3.3. 여래 응량기(如來應量器)
싣달타 태자가 깨달음을 얻어 부처님이 되시자, 동서남북 사방의 천왕이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려고 각기 공양 그릇인 발우에 진미의 공양을 담아 올리게 된 고사에서부터 비롯된다. 그러나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네 발우는 한 발우가 되고 또 양에 알맞는 공양이 되었다.
이로써 여래응량기(如來應量器)라 하니, 부처님은 모든 중생에게 마땅히 공양을 받으실 분이며 또 모든 사람은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므로 커다란 복덕을 짓게 되는 것이다.
이후엔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 그릇은 불기(佛器)라 불려 지고 스님들의 음식 그릇을 발우라 하게 되었다.
스님들께서 공양을 받기 위해 발우를 펴면서 “부처님의 응량기를 내 이제 펴나니, 원컨대 일체 중생이 다함께 불도를 얻을 지이다.”하고 발원한다.
본래 그릇의 숫자는 하나의 발우이나 후대에 사방의 천왕이 올린 것과 같이 스님들의 발우가 네쪽이 되었다. 그러나 크기가 점점 작아져서 모두 포개면 제일 큰 그릇 안에 다 들어가게 되어 하나로 합해 진다.
8.3.4. 검소한 식생활
발우를 만드는 재료도 쇠붙이나 흙으로 구워서 만들었으니 철발우, 질그릇발우였으나 중국과 우리 나라에 와서 나무로 만든 목발우가 생겼고 근래엔 플라스틱으로 만든 발우까지 등장하였다.
스님들의 음식 그릇이 한 발우면 충족되었던 시대는 스님들이 전혀 음식을 만들지 않고 신도들이 만든 음식을 공양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후대에 스님들이 직접 음식을 만들어 먹어야 하게 됨에 여러 가지 도구들이 필요하여 졌다.
하지만 한 발우로써 만족하라고 가르치시는 부처님의 뜻은 변함이 없어 많은 음식을 탐하지 않고 좋고 나쁜 음식을 가리지 않고 오직 도업을 성취하는 데 목적을 두고 이 몸을 유지함이 수행하는 것이다.
한 벌의 발우를 펴서 네 쪽의 발우가 되는데 여기에는 물.밥.국.반찬을 담게 되었으며 또 담은 음식은 알맞게 하여 먹다가 남기질 않는 것이 규칙이다.
근래에 식판이란 것이 세상에서 사용되는데, 스님들이 사용하는 발우와 같이 각기 음식의 담는 곳을 만들어 사용하고 다. 스님들의 식생활은 모든 음식을 귀중히 생각하여 조금도 소홀하지 않으며, 맛있고 좋은 음식을 탐하지 않고, 건강을 유지하는데 충족하는 것으로 검소한 생활이라 할 것이다.
8.4. 염주(念珠)
8.4.1. 염주. 수주
염주는 글자 그대로 생각하기 위한 구슬이다. 불자가 항상 생각하는 것이 부처님이므로 이 염주는 부처님을 생각하면서 돌리는 염불하는 도구다.
염주는 수주(數珠)라고도 하니 이는 염불을 하면서 그 수를 헤아리는데 사용하는 구슬이란 뜻에서다. 이는 염불을 할 때에 다른 잡념을 없이하고 오직 전념 몰두할 수 있도록 염주를 사용하여 조금도 어긋남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8.4.2. 염주의 유래
염주의 시초는 부처님 당시부터인데, "불설목환자경(佛說木患子經)"에 보면, 난국(難國)의 왕 파유리가 부처님께 사신을 보내어서 사뢰기를, " 세존이시여! , 저희 나라는 해마다 도적과 병과 흉년으로 백성들의 고통이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편할 날이 없습니다. 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부처님, 부처님의 가르침은 깊고 넓어서 저와 같이 일이 많은 사람은 닦아 행할 수가 없으니 특별히 자비를 베푸셔서 저 같은 사람들도 쉽게 수행할 수 있는 간편한 방법을 가르쳐 주소서" 하였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가르치셨다.
"만약 번뇌의 장애와 업보의 장애를 없애고자 하거든 무환나무 열매(木患子) 백여덟개를 꿰어서 항상 지니면서 걷거나 앉거나 눕거나 간에 늘 흩어짐이 없는 지극한 마음으로 불,법,승 삼보의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씩 돌려서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계속하라. 그리하여 만약 몸과 마음이 산란함이 없이 이십(二十)만 번을 채우면 백팔 번뇌가 끊어져 버릴 것이니, 이제 비로소 생사의 흐름에서 벗어날 것이며, 마침내 열반에 나아가서 영원히 번뇌가 없는 최상의 과보를 얻으리라." 라고 하셨다.
부처님께서 예배할 때 손에 걸거나, 손으로 돌리며 부처님을 간절히 생각하는 수를 헤아려 잡념을 없애고 정신을 한 곳에 집중시키려는 데 사용하는 구슬이다.
8.4.3. 염주의 종류
염주를 만드는 재료에 따라 자거 염주, 목환자 염주, 진주 염주, 율무 염주, 보리자 염주, 시우쇠 염주, 구리 염주, 수정 염주, 연자 염주, 등으로 부르고, 또 염주의 숫자에 따라 백팔 염주, 천 염주, 단주(손목에 거는 7개, 16개, 21개)등이 있다.
제일 큰 것을 1080주로 상품주(上品珠)라 하며 108염주를 최승주(最勝珠)라 하여 염주의 대표적이며 54주를 중품주 27주를 하품주라 한다.
백팔 염주를 자세히 말하면 12로 나누어 “최초의 머리 한 개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표하고, 4개는 네 보살, 6개는 육바라밀, 8개는 팔금강, 28개는 이십팔사, 또 28개는 28수, 4개는 사대천왕, 2개는 토지신, 18개는 18지옥, 그리고 마지막 1개는 염주를 가진 제자니라.”고 하였다....수주경(數珠經)
8.4.4. 백팔번뇌(百八煩惱)
중생의 번뇌 수효가 108이라는 말로 6근(六根 ; 眼, 耳, 鼻, 舌, 身, 意)으로 6근(六境 ; 色, 聲(성), 香, 味, 觸, 法)을 대할 때 저마다 호(好), 오(惡), 평등(平等)의 세 가지가 서로 같지 않아서 18번뇌를 일으키고, 고(苦), 락(樂, 사(捨)의 3수(三受)가 있어서 18번뇌를 내니 모두 합하여 36종, 이를 3세(三世; 과거, 현재, 미래)에 배하여 108번뇌가 된다.
8.4.5. 염주의 공덕
염주가 표시하는 것은 불보살의 위신력을 다툼이니 “염주 구슬은 보살의 수승한 과보요, 꿰는 줄은 관세음 보살을 표시하며 모주(母珠)는 무량수(無量數)를 표시한 것이니 함부로 밟거나 넘어가지 말라.”고까지 하셨다
<금강경유가염주경>
또 “문수보살이 말씀하시기를 염주의 재료는 다른 어떠한 구슬보다도 보리수의 열매로 하는 것이 가장 수승하여서 이 염주로 염불을 모시면 그 공덕은 이루 말할 수 없고, 법다운 염불을 못하는 자라도 다만 지니기만 하는 것으로도 커다란 뜻이 있다.”고 하셨다. <교량수주공덕경>
일반적으로 염주에는 모주(母珠 큰 구슬)가 있어 부처님이나 보살을 표시하여 모시게 되는 것이니 백팔 염주를 가지고 염불을 하게 되면 우리 중생이 지니는 과거.현재.미래의 고통과 슬픔인 백팔 번뇌를 모두 소멸하고 안락을 얻게 되는 첩경(지름길)이 되는 공덕이 있는 것이다.
염주는 염불을 하는데 수를 헤아리는 수주로서만 아니라, 염불을 모시는데 일념이 되도록 도와주는 법구로서, 나아가 불보살을 상징하는 공덕주로서 몸에 지니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안정되어 모든 잡귀들이 보기만 하여도 도망쳐서 화를 쫓고 복을 부르는 신비한 영험까지 지니게 되며, 악한 자는 저절로 착한 마음을 지니게 되는 공덕을 나게 하는 것이다.
8.5. 기타 승물(僧物)
8.5.1. 스님이 갖는 여섯 가지 물건(六物)
스님들이 필요로 갖는 물건에 여섯 가지가 있으니 이미 설명한 옷 세 가지(승가리,울다라승,안타회)와 음식 그릇인 발우와 앉을 때 까는 좌구(坐具)인 니사단(尼師壇)과 물속에 있는 벌레를 잘못하여 마시지 않을까 하여 물을 걸러내는 주머니인 녹수낭(漉水囊)이 있다.
8.5.2. 스님들이 왕래에 필요한 열여덟 가지 물건(十八物)
보살계에 보살이 두타행(이곳 저곳에 왕래하며 수행)을 할 때에 몸에 지니는 물건에 열 여덟 가지가 있다고 한다.
이는 ㊀칫솔(楊枝:양지) ㊁비누(澡豆:조두) ㊂옷 세 가지(三衣) ㊃물병(軍持:군지) ㊄발우(鉢盂) ㊅좌구(坐具) ㊆지팡이(錫杖:석장) ㊇향로(香爐) ㊈녹수낭(漉水囊) ㊉수건(手巾) 머리 깎는 칼(刀子) 성냥 족집게(鑷子:섭자) 승상(繩床) 불경(經) 율전(律典) 불상(佛像) 보살상(菩薩像) 등이다.
8.5.3. 기타 승물
①육환장(六環杖) . 석장)(錫杖)
스님들이 짚는 지팡이를 말한다. 지팡이 머리는 탑 모양으로 만들어 큰 고리를 깨웠고, 큰 고리에 작은 고리 여러 개를 달아, 길을 갈 때에 땅에 짚으면 고리가 부딪히는 소리를 내어 짐승이나 벌레 등을 일깨우는 것이다.
또 남의 집에 가서 밥을 빌 때에 자기가 온 것을 그 집 사람에게 알리기 위하여 흔드는 것이다.
인도에서는 극기라(Khakkhara)라 하고 우리 나라에서는 육환장이라 한다.
②불자(拂子) 또는 불진(拂塵)
모기나 파리 등을 쫓기 위하여 쓰이는 총채와 같은 것이다. 삼론종에서는 8불(不)의 바람으로써 8미(迷)의 망진(妄塵)을 떨어버리는 것을 말한다.
③묵언패(黙言牌) . 금족패(禁足牌) . 상당패(上堂牌)
절에 들어서면 건물에 따라 나무 조각으로 패를 만들어 걸어 놓은 곳이 있다.
네모난 나무 조각에 묵언(黙言).금족(禁足) 또는 상당(上堂)이라 써서 걸어 놓는 것이니 묵언패가 걸려 있는 곳에선 일체 소리를 내지 말고, 금족패가 걸려 있으면 출입을 해서는 안된다. 이는 수행인들이 일념으로 정진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여 스님들 스스로 뿐만 아니라 일반 신도들에게도 경계하는 것이다.
또한 옛날에는 법당을 출입할 때에는 상당패가 걸려 있을 때만 출입하였으나 지금은 모든 대중에게 공개되어 있는 곳이 법당이기에, 상당패는 사라지고 볼 수 없게 되었다.
9. 제장; 향과 촛불을 밝히는 뜻
향과 초는 자기 몸을 태움으로써 아름다운 향기와 광채를 발산한다. 향은 여러 가지 모양과 빛깔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함께 몸을 태울 때 그 연기는 하나로 된다. 이것은 이기심과 자만심을 뛰어넘어 모든 사람이 화합함을 뜻한다.
그리고 초는 자기의 몸을 태움으로써 밝은 빛을 내어 어둠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아름다운 자기 희생이다.
향과 초는 그것이 다 타도록 향기를 풍기고 밝은 빛을 낸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끊임없는 우러름과 정성과 부처님에 대한 찬탄의 마음을 표현해 주고 있으며, 끊임없는 기원(祈願)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 향과 촛불을 울리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이 더욱 향기롭고 빛나도록 하기 위해서다. 우리는 몸과 마음을 부지런히 닦아 마음의 향기를 갖고 어두움을 밝히는 구실을 해야 한다.
10. 제장; 합장(合掌)
10.1. 합장의 방법
손가락이 서로 어그러지거나 벌어지면 안되며 팔꿈치를 들어올려도 안된다.
손바닥을 틈이 생기지 않도록 한 데 모은다.
손목을 가슴 한가운데의 움푹 들어간 곳에 손가락 두마디 정도 떨어지도록 한다.
두 팔을 겨드랑이에서 약간 떨어지도록 하며, 고개를 반듯하고 공손하게 세워 마음을 한 곳으로 모은다. 손 끝은 코끝을 향하도록 자연스럽게 세워야 한다. 이와 같은 자세로 몸을 공손히 굽혀서 반절을 하는 것을 합장예의라고 한다.
10.2. 합장의 의미
합장은 부처님께 귀의를 뜻하는 동시에 우리의 흩어진 마음을 한곳으로 모아, 모든 정성을 다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리고 오른손은 부처님의 세계를, 왼손은 중생인 자기를 상징하며 부처님의 세계에 자기의 마음을 한데 합함으로써 절대적인 권위를 바친다는 뜻이 있다. 이는 부처님에 대한 우리의 심신과 귀의를 밖으로 들어내 보이는 마음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나와 다른 이와의 화합을 의미하기도 한다.
11. 제장; 절(참배)
11.1. 절의 방법
큰 절을 하기 전에 먼저 합장을 하고 부처님을 향해 반절을 한 다음 큰 절을 한다.
합장 상태에서 두 무릎을 가만히 굽히며
오른손을 이마가 닿을 곳에 먼저 짚은 다음,
왼손을 오른손과 나란히 짚고,
이마가 바닥에 닿도록 푹 숙이며 몸을 납작 엎드려야 한다.
일어날 때는 반대의 동작으로 일어나면 되며, 반절할 때는 합장을 하고 공손한 자세로 몸을 육십도 정도 굽힌다.
주의할 점은 무릎을 꿇고 엎드릴 때 오른발이 밑으로 왼발이 위로 가도록 하며, 일어날 때는 반대의 동작으로 해야 한다.
절은 3번, 7번, 21번, 108번, 1000번, 3000번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평상시에는 3번이나 7번을 하게 된다.
*고두례 ; 고두례라는 것은 마지막 절을 하고 바로 일어서지 않고 앉은 자세에서 다시 한번 반복하여 절하는 것으로 일명 유원반배(唯願半拜)라고 한다.
11.2. 절의 의미
절은 존경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며, 자기자신을 모두 내맡긴다는 뜻이며, 겸손한 마음을 나타내는 방법이다. 우리들은 오직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절을 해야 한다.
마음이 어지러운 사람이 절을 많이 하고 나면 나쁜 마음이 일어나지 않고 어지러운 마음이 가라앉아 참다운 깨달음이 열리게 된다.
11.3. 절하는 열 가지 공덕
아름다운 몸을 받게 되고
무슨 말이나 남들이 믿으며
어느 곳에서라도 두려움 없으며
부처님께서 항상 보호하시며
훌륭한 위의를 갖추게 되며
모든 사람들이 친하길 바라며
하늘 사람들이 사랑하고 공경하며
큰 복과 덕을 갖추게 되며
명을 바치고는 극락 세계 태어나며
마침내 열반을 증득한다.
이러한 공덕은 다만 자신의 교만한 마음을 꺾고 삼보를 정성껏 받들어서 지성으로 절 할 때 이루어진다. 나아가 전신운동으로 건강 제일이요, 공덕도 되니 절을 많이 하도록 하자.
12. 제장; 부모은중경
낳으시고 기르신 은혜
첫째는, 아기를 배어서 수호해 주신 은혜
둘째는, 해산에 임하여 고통을 받으신 은혜
셋째는, 자식을 낳고서 근심을 잊으신 은혜
넷째는, 입에 쓴 것을 삼키고 단 것이면 뱉어서 먹이시던 은혜
다섯째, 마른 자리는 아기에게 돌리시고 스스로는 젖은 자리로 나아가신 은혜
여섯째, 젖을 먹여 기르시는 은혜
일곱째, 부정한 것을 깨끗이 씻어주신 은혜
여덟째, 자식이 먼 길 떠나면 염려하고 생각하신 은혜
아홉째, 자식을 위하여 나쁜 일을 감히 하시는 은혜
열째는, 끝없이 자식을 사랑하는 은혜
------ 부모은중경 중에서
제 1 분 ; 법회를 이루다 (서 분)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한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舍衛國) 왕사성(王舍城)에 있는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에서 대비구(比丘) 삼만팔천인(三万八千人)과 그 밖에 많은 보살(菩薩) 마하살들과 함께 계셨다.
제 2 분 ; 마른 뼈의 가르침 (정종분)
그 때에 세존께서 대중을 거느리시고 남방으로 나아가시다가 한 뼈 무더기를 보시더니 五체를 땅에 붙이시어 그 마른 뼈를 정중히 예배하셨다. 이를 본 아난과 대중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바로 三계의 큰 스승이시며 사생(四生)의 어버이시라 여러 사람들이 귀의하고 공경하옵거늘 어찌하여 이름 모를 뼈 무더기에 친히 절하시옵니까 ? "
부처님께서 다시 아난에게 이르셨다.
" 네가 비록 나의 상족제자(上足弟子)이며 출가한 지도 오래 되었지만 아는 것은 넓지 못하구나, 이 한 무더기의 마른 뼈가 어쩌면 내 전생의 조상이거나 여러 대에 걸친 부모일 것이므로 내가 지금 예배한 것이니라."
부처님께서 다시 아난에게 이르셨다.
" 네가 이 한 무더기 마른 뼈를 둘로 나누어 보아라. 만일 남자의 뼈라면 희고 무거울 것이며 여인의 뼈라면 검고 가벼우리라."
아난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 세존이시여, 남자는 세상에 있을 때 큰 옷을 입고 띠를 띠고 신을 신고 모자를 쓰고 다니기에 남자인 줄 아오며, 여인은 생전에 붉은 주사와 연지를 곱게 바르고 난사(蘭麝)로 치장하고 다니므로 여인인줄 알게 되옵니다. 그러나 죽은 후의 백골은 남녀가 마찬가지 이옵거늘 어떻게 그것을 제자로 하여금 알아보라고 하시옵니까 ?"
부처님께서 다시 아난에게 이르셨다.
" 만일 남자라면 세상에 있을 때에 가람에 들어가서 법문도 듣고 경도 외우며 삼보(三寶)께 예배하고 염불도 하였을 것이니라. 그런 까닭에 그 사람의 뼈는 희고 또 무거우니라. 그러나 여인은 세상에 있을 때에 감정을 함부로 하고 음욕을 행하여, 자녀를 낳고 기름에 있어 한번 아기를 낳을 때에 서말 서되나 되는 엉킨 피를 흘리며 아기는 어머니의 흰 젖을 여덟섬 너말이나 먹느니라. 그런 까닭에 뼈가 검고 가벼우니라."
아난이 이 말씀을 듣고 가슴이 터질 듯하여 눈물을 흘려 슬피 울면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 세존이시여, 어머님의 은덕을 어떻게 보답할 수 있으오리까 ?"
제 3 분 ; 잉태하였을 때의 고생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이르셨다.
" 너는 이제 자세히 들어라. 내가 너를 위하여 분별해설하리라. 무릇 사람이 이 세상에 있게 됨은 부모를 인연하기 때문이니라. 아버지가 아니면 나지 못하고 어머니가 아니면 자라지 못하나니 어머니 몸속에 의지하여 달이 차면 이 땅에 태어나게 되느니라. 이로부터 어머니는 여덟 섬에 너말의 젖을 자식에게 먹이고 열 손가락 손톱에 묻은 자식의 더러운 것을 먹으니 어머니의 은혜는 하늘과 함께 다함이 없느니라. 어머니가 아기를 가지면 열달 동안의 신고(辛苦)는 무엇으로도 형용할 수 없느니라.
어머니가 잉태한 첫달에는 그 기운이 마치 풀잎 위의 이슬 같아서 아침에는 잠시 보존하나, 저녁에는 보존하지 못하나니, 이른 새벽에는 모여 왔다가 오시(午時)만 되면 흩어져 가느니라. 그러다가 잉태한 지 두달이 되면 우유를 끓였을 때 엉긴 거와 같이되느니라. 잉태한 지 세달 째에는 그 기운이 마치 엉킨 피와 같이되고 잉태한 지 네달째에는 차츰 사람의 모양을 이루며 다섯 달에는 어머니 뱃속에서 아기의 다섯 부분의 모양이 생겨나느니라. 무엇을 아기의 다섯 부분이라 하랴, 머리가 한 부분이고 두 팔꿈치까지 합하면 세 부분이고 두 무릎을 합치면 다섯 부분이 되느니라.
잉태한 지 여섯 달이 되면 어머니 뱃속에서 아기의 여섯 가지 정기(六氣)가 열리느니라. 여섯 가지 정기란 눈이 한 정기요, 귀가 둘째 정기가 되고, 코가 셋째 정기이며, 입이 넷째 정기가 되고, 혀가 다섯째 정기가 되며, 뜻이 여섯개 정기니라.
어머니가 잉태한 지 일곱 달이 되면 어린 아기가 어머니 뱃속에서 삼백육십(三百六十) 뼈마디와 팔만 사천(八万四千) 모공(毛孔)이 생기느니라. 잉태한 지 여덟 달이 되면 그 뜻과 지혜가 생기고 아홉 구멍이 크나니라.
잉태한 지 아홉 달이 되면 아기가 어머니 뱃속에서 무엇인가를 먹게 되나니 이때 복숭아나 배나 마늘은 먹지 않고 오곡(五穀)만을 먹느니라. 어머니의 생장(生藏)은 아래로 향하고, 숙장(熟藏)은 위로 향하여 있는데 그 사이에 한 산이 있으니 이 산에는 세 가지 이름이 있느니라. 한가지는 수미산(須彌山)이요, 또 한가지는 업산(業山)이요, 또 한가지는 혈산(血山)이니라. 이 산이 한번 무너지면 화하여 한 줄기의 엉긴 피가 되어서 아린 아이의 입 속으로 흘러 들어가느니라.
잉태한 지 열달 만에 바야흐로 태어나나니 만약 효순한 아들이라면 주먹을 쥐어 합장하고 나와서 어머니 몸을 상하지 않게 하느니라. 그러나 만일 오역죄(五逆罪)를 지은 자식이라면 어머니의 포태(胞胎) 제치고, 손으로는 어머니의 가슴과 복장을 움켜잡고 다리로는 어머니의 엉덩이 뼈를 밟아서 어머니로 하여금 마치 천개의 칼로 배를 저으며 만개의 칼로 가슴을 쑤시는 듯하게 하느니라. 이와 같이 어머니를 고통스럽게 하고 이 몸이 태어났는데도 그 위에 다시 열 가지의 큰 은혜가 있느니라. “
제 4 분 ; 낳으시고 기르신 은혜
첫째는 아기를 배어서 수호해 주신 은혜니라.
송(松)으로 이르리라.
여러 겁을 내려 오며 인연이 중하여서
어머니의 태를 빌어 금생에 태어날때
날이 가고 달이 저서 五장이 생겨나고
일곱 달에 접어 드니 六정이 열렸어라
한 몸이 무겁기는 산악과 한가지요
가나 오나 서고 안고 풍재가 겁이나며
아름다운 비단 옷도 도무지 뜻없으니
단장하던 경대에는 먼지만 싸였더라
둘째는 해산에 임하여 고통을 받으신 은혜니라
송(松)으로 이르리라.
아기를 몸에 품고 열달이 다차가서
어려운 해산 달이 하루하루 다가오니
하루 하루 오는 아침 중병 들은 몸과 같고
하루 하루 깊어 가니 정신조차 아득해라
두렵고 떨리는 맘 무엇으로 형용할까
근심은 눈물 되어 가슴 속에 가득하니
슬픈 생각 가이 없어 친족들을 만날 때면
이러다가 죽지 않나 이것 만을 걱정하네
세째는 자식을 낳고서 근심을 잊으신 은혜니라.
송(松)으로 이르리라.
자비하신 어머니가 그대를 낳으신 날
五장 六부 그 모두를 쪼개고 헤치는 듯
몸이나 마음이나 모두가 끊어졌네
짐승잡은 자리같이 피는 흘러 넘쳤어도
낳은 아기 씩씩하고 충실하다 말들으면
기쁘고 기쁜 마음 무엇으로 비유할까
기쁜 마음 정해지자 슬픈 마음 또 닥치니
괴롭고 아픈 것이 온 몸에 사무친다.
네째는 입에 쓴것은 삼키고 단것이면 뱉아서 먹이시던 은혜니라
송(松)으로 이르리라.
중하고도 깊고 깊은 부모님의 큰 은혜요
사랑하고 보살피심 어느 땐들 끊일손가
단것이란 다 뱉으니 잡수실게 무엇이며
쓴것만을 삼키어도 밝은 얼굴 잃지 않네
사랑하심 중하시사 깊은 정이 끝이 없어
은혜는 더욱 깊고 슬픔 또한 더 하셔라
어느 때나 아린 아기 잘 먹일것 생각하니
자비하신 어머님은 굶주림도 사양찮네.
다섯째는 마른 자리는 아기에게 돌리시고 스스로는 젖은 자리로 나아가신 은혜니라.
송(松)으로 이르리라.
어머니 당신 몸은 젖은 자리 누우시고
아기는 받들어서 마른 자리 눕히시네
양쪽의 젖으로는 기갈을 채워주고
고운 옷 소매로는 찬 바람 가려주네
은혜로운 그 마음에 어느 땐들 잠드실까
아기의 재롱으로 기쁨을 다하시네
오로지 어린 아기 편할 것만 생각하고
자비하신 어머니는 편안할 것 안구하네
여섯째는 젖을 먹여 기르시는 은혜니라.
송(松)으로 이르리라.
어머니의 중한 은덕 땅에다 비유할까
아버님의 높은 은덕 하늘에 견줘볼까
하늘 은혜 땅의 은혜 이 은혜를 크다하랴
아버지와 어머니의 크신 은덕 그를 넘네
아기 비록 눈 없어도 미워할 줄 모르시고
손과 발이 불구라도 싫어하지 않으시네
배 가르고 피를 나눠 친히 낳은 자식이라
종일토록 아끼시고 사랑하심 한이 없네
일곱째는 부정한 것을 깨끗히 씻어주신 은혜니라
송(松)으로 이르리라.
생각하니 그 옛날의 아름답던 그 얼굴과
아릿다운 그 몸매는 유연도 하셨어라
두 눈썹은 푸른 버들 가른 듯 하였었고
두 뺨의 붉은 빛은 연꽃보다 더 했어라
은혜가 깊을수록 옥의 모습 스러졌고
부정한 것 씻느라고 맑은 얼굴 상했어라
오로지 아들 딸만 사랑하고 거두시다
자비하신 어머니는 얼굴 모양 바뀌셨네
여덟째는 자식이 먼 길 떠나면 염려하고 생각하신 은혜니라.
송(松)으로 이르리라.
죽어서 헤어짐도 참아가니 어렵지만
살아서 헤어짐은 아프고 서러워라
자식이 집을 나가 먼 길을 떠나가니
어머니의 모든 마음 타향 밖에 나가있네
밤 낮으로 그 마음은 아들일을 따라가고
흐르는 눈물 줄기 천 줄긴가 만 줄긴가
원숭이 달을 보고 새끼 생각 울부짖 듯
염려하는 생각으로 간장이 다 끊기네
아홉째는 자식을 위해 나쁜 일을 감히 하시는 은혜니라.
송(松)으로 이르리라.
부모님의 은혜가 강산같이 중하거니
깊고 깊은 그 은덕은 실로 갚기 어려워라
자식의 괴로움은 대신 받기 원하시고
자식이 고생하면 부모 마음 편치않네
자식이 머나먼 길 떠난다 들을지면
잘 있는가 춥잖은가 밤낮으로 걱정이고
자식들이 잠시 동안 괴로운 일 당할때면
어머님의 그 마음은 오래 두고 아프셔라.
열째는 끝없이 자식을 사랑하는 은혜니라.
송(松)으로 이르리라.
부모님의 크신 은덕 깊고도 중하여라
크신 사랑 잠시라도 끊일 사이 없으시니
앉으나 일어서나 그 마음이 따라가고
멀든지 가깝던지 크신 뜻은 함께 있네
어머니 나이 높아 一백살이 되었어도
八십살 된 그 아들을 어느 때나 걱정하네
이와같은 크신 사랑 어느 때에 끊치실까
수명이나 다하시면 그때에나 쉬실까.
제 5 분 ; 불효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이르셨다.
“ 내가 중생을 보니 비록 사람 모양은 갖추었으나 마음과 행실이 어리석고 어두워서 이토록 큰 부모의 은덕이 있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공경심을 내지 않으며 은혜를 저버리고 덕을 배반하며 어질고 자비한 마음이 없어서 효도하지 않고 의리가 없더라.
어머니가 아기를 가진 열 달 동안은, 일어서고 앉는 것이 편하지 아니하여 마치 무거운 짐을 진 것 같고 음식이 잘 내리지 않아 마치 큰 병든 사람과 같으니라. 달이 차서 아기를 낳을 때는 한없는 온갖 고통을 받으며 잠깐 잘못으로 죽게 될까 두려워하며 돼지나 양을 잡은 것 같이 피가 흘러 바닥을 적시느니라. 이런 고통을 겪으면서도 자식을 낳으신 후에는 쓴 것은 삼키시고 단 것은 뱉어서 아기에게 먹이면서 품안에 안아서 기르느니라. 더러운 것은 말끔히 씻어 내고 아무리 힘들어도 싫어하지 않으시며 더운 것도 참고 추운 것도 참아 고생하는 것을 사양하지 않느니라. 마른 데는 아기를 눕히고 젖은 데는 어머니 차지니라. 三년 동안 어머니의 흰 피를 먹고 자라나서 동자가 되고 점점 나이가 차 가면 예절과 도의를 가르치며 장가들이고 시집보내고 벼슬도 시키고 직업도 갖게 하느니라. 수고롭게 가르치고 정성 들여 기르는 일이 끝나도 부모의 은혜로운 정은 끝나지 않느니라. 자식들이 병이 나고 병이 나으면 부모의 병도 바야흐로 낫느니라. 이렇게 양육하여 어서 어른이 되기를 바라느니라.
자식은 드디어 장성한 뒤에는 도리어 효도를 하지 않느니라. 존친들과 더불어 이야기함에도 그 웅대함이 불공스럽고 심지어 눈 흘기고 눈알을 부라리며 부모의 형제도 속이고 업신여기며, 형제간에 때리고 욕하며 친척들을 헐뜯고 예절과 의리가 없으며 스승의 가르침도 따르지 않고 부모의 가르침이나 분부도 따르지 않느니라.
형제간이 함께한 말도 짐짓 지키지 않으며 출입 왕래를 어른께 아뢰지 않고 말과 행실이 어긋나 스스로 교만하고 함부로 일을 처리하느니라. 부모로서 이를 훈계하고 책망하며 백부나 숙부들이 그 잘못을 타일러야 하는데도 어려서부터 어여쁘게만 생각하여 존장들이 덮어두기만 하니 그가 점점 장성하면서 거칠어지고 잘못되느니라. 잘못한 일을 고치려 하지 아니하고 잘못을 일러주면 오히려 성을 내고 원망하며, 착한 여러 벗을 버리고 악한 사람을 가까이하느니라. 이러한 습성이 거듭되어 성격을 이루게 되니 드디어 나쁜 계교를 꾸미게 되고 남의 꾀임에 빠져 타향으로 도망쳐 가기도 하느니라. 이와 같이 부모를 배반하며 집을 떠나고 고향을 등져 혹 장사 길로 나아가기도 하고 전쟁에 나가기도 하여 이럭저럭 지내다가 장가를 들게 되면 이것이 걸림이 되어 오래도록 집에 돌아오지 못하게 되느니라.
혹은 타향에서 지내는 동안 조심하지 않다가 남의 꾐에 빠져 횡액을 만나 잡힌 몸이 되어 끌려 다니기도 하고 억울하게 형벌을 받기도 하며 감옥에 갇히어 목에 칼을 쓰고 발목에 쇠사슬을 차기도 하며 혹은 병을 얻어 고난을 당하거나 모진 액난에 얽혀 어렵고 고통스럽고 배고프고 고달파도 아무도 돌봐주는 사람이 없게도 되느니라. 또 남의 미움과 천대를 받아 길거리에 나와 앉아 의지할 데 없다가 마침내 죽게 되어도 누가 그를 보살펴 줄 사람도 없고, 이윽고 죽으면 시체가 붓고 썩어서 볕에 쪼이고 바람에 맞아 백골이 아무렇게나 타향 땅에 굴러다니게 되니 친족들과 즐겁게 만난다는 것은 영영 어긋나고 마느니라.
이렇게 되면 부모의 마음은 자식을 따라 길이 근심 걱정하나니 혹은 피눈물로 울다가 눈이 어두워져 마침내 멀기도 하며 혹은 너무 슬퍼하다가 기운이 쇠진하여 병들기도 하느니라. 자식 생각에 몸이 쇠약하여 마침내 죽기도 하며 외로운 혼이 되어서도 끝내 자식 생각을 잊어버리지 못하느니라.
혹은 다시 들으니 자식이 효도와 의리를 숭상하지 아니하고 나쁜 무리들을 따라서 어울려서 추악하고 우악스러운 건달패가 되어 무익한 일을 즐겨 익히고 남과 싸우고 때리며, 또는 도둑질을 하고 마음의 풍속을 범하며 술 마시고 노름하고 여러 가지 과실을 저지르느니라. 이로 인하여 형제에까지 누가 미치고 부모에게 큰 걱정을 끼치느니라. 새벽에 집을 나가 늦게 집에 돌아와서 부모에게 항상 근심하게 하느니라.
또 부모가 지내는 사정과 춥고 더운 것을 아는 체 아니하고 초하루와 보름에도 문안드리지 아니하며 길이 부모를 편히 모실 것을 생각하지 않고 부모가 나이 많아 모양이 쇠약하고 파리하게 되면 남이 볼까 부끄럽다고 구박하고 괄시하느니라.
혹은 또 아버지가 홀로 되거나 어머니가 홀로 되어 혼자서 빈 방을 지키게 되면 마치 손님이 남의 집에 붙어있는 것처럼 여겨서 평상이나 자리에 흙이 쌓여도 한번도 씻을 때가 없으며 부모가 있는 곳에 들어가 문안하거나 보살피는 일이 없기도 하느니라. 방이 춥거나 덥거나 또는 부모가 배고파하거나 목 말라하는 것을 일찍이 아는 체하지 않느니라.
이렇게 되니 부모는 밤낮으로 항상 탄식하고 슬퍼하게 되느니라. 혹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마땅히 부모에게 가져가서 봉양해야 하는데도 매양 거짓으로 부끄러운 체하며, 또 다른 사람이 웃는다 하면서도 이것을 가져다가 제 아내나 자식에게 주나니, 이것이 추하고 못된 짓이고 괴로운 일일지라도 수고로움도 부끄러움도 피하지 않느니라. 또 아내와의 약속은 무슨 일이든지 다 쫓으면서 어른의 말씀과 꾸지람은 전혀 어렵거나 두렵게 생각하지 않느니라.
혹, 딸 자식으로서 남의 배필이 되어 가면 시집가기 전에는 모두가 효순하던 것이 시집간 이후에는 불효한 마음이 늘어가기도 하느니라. 성이 다른 남편 쪽의 종친에게는 정이 깊고 사랑이 두터우면서 자기의 친족들은 도리어 멀리하느니라. 혹 남편을 따라서 타향으로 옮겨 가게 되면 부모를 이별하면서도 도무지 사모하는 생각이 없으며 소식이 끊기고 편지도 없어서 부모로 하여금 창자를 끌어내고 거꾸로 매달리는 듯한 고통받으며 매양 딸의 얼굴을 보고 싶어하기를 마치 목 마를 때 물을 생각하듯이 잠시도 끊일 날이 없게 하느니라.
부모의 은덕은 이와 같이 한량없고 끝이 없건만 이 은덕을 배반하고 가지가지로 불효하는 허물은, 그것을 졸지에 다 말하기 어려우니라. “
제 6 분 ; 보은의 어려움
이 때에 대중들이 부처님께서 부모의 은덕을 말씀하심을 듣고, 몸을 일으켜 땅에 던지고 스스로 부딪혀 몸에서 모두 피를 흘리면서 쓸어졌다가 한참만에 깨어나서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 슬프고 슬프도다. 우리들은 큰 죄인임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이제껏 깨닫지 못하여 캄캄하기가 마치 밤에 노는 것 같더니 이제야 잘못됨을 깨닫고 보니 가슴속이 부서지는 것 같습니다.”
“ 바라옵건대 세존이시여, 저희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구원하여 주옵소서, 어떻게 하여야 부모의 깊은 은덕을 갚을 수 있으오리까.”
그때에 여래께서는 곧 여덟 가지 깊고 중한 범음(梵音)으로 여러 대중들에게 이르시었다.
“ 너희들은 마땅히 알지어다. 내가 이제 너희들을 위하여 분별 해설하리라.”
“ 가령 어떤 사람이 왼쪽 어깨에 아버지를 업고, 오른쪽 어깨에 어머니를 업고서, 수미산을 백천번을 돌아 피부가 닳아져 뼈가 드러나고 닳아서 골수가 드러나더라도 부모의 깊은 은혜는 마침내 다 갚지 못하느니라.
또 가령 어떤 사람이 흉년을 당하여 부모를 위하여 자기의 온 몸뚱이 살을 도려내어 티끌같이 잘게 잘리도록 고통을 받으며 공양하기를 백천겁 동안을 계속하더라도 오히려 부모의 깊은 은혜는 다 갚지 못하느니라.
또 가령 어떤 사람이 손에 날카로운 칼을 가지고 부모를 위하여 자기의 소중한 눈동자를 도려내어 부처님께 바치기를 백천겁 동안 계속하더라도 오히려 부모의 깊은 은덕은 다 갚지 못하느니라.
또 가령 어떤 사람이 부모를 위하여 역시 날카로운 칼로써 그의 심장과 간을 찔러 피가 흘러 땅을 덮어도 아프고 괴로움을 사양하지 않기를 백천겁을 지나더라도 오히려 부모의 깊은 은혜는 다 갚지 못하느니라
또 가령 어떤 사람이 부모를 위하여 백천 자루의 칼로 자기 몸을 찔러 칼날이 좌우로 드나들기를 백천겁을 계속하더라도 오히려 부모의 깊은 은혜는 다 갚지 못하느니라.
또 가령 어떤 사람이 부모를 위하여 자기 몸에 불을 질러 등을 만들어 부처님께 공양하기를 백천겁을 지내더라도 오히려 부모의 깊은 은혜는 다 갚지 못하느니라
또 가령 어떤 사람이 부모를 위하여 뼈를 부숴 골수를 내어 백천개의 칼날과 창끝으로 일시에 자기 몸을 쑤시기를 백천겁 동안을 계속하더라도 오히려 부모의 깊은 은혜는 다 갚지 못하느니라
또 가령 어떤 사람이 부모를 위하여 뜨거운 무쇠 덩어리를 삼켜 백천겁을 지나도록 온 몸이 데어 부풀더라도 오히려 부모의 깊은 은혜는 다 갚지 못하느니라.“
이 때에 여러 대중들은 부처님께서 부모의 깊은 은덕을 말씀하심을 듣고 눈물을 흘리고 슬피 울면서 거듭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 세존이시여, 저희들이 참으로 큰 죄인임을 알았습니다. 어떻게 하여야 부모의 깊은 은혜를 갚을 수 있으오리까.”
부처님은 제자들에 이르셨다.
“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려거든 부모를 위하여 이 경을 서사하고 부모를 위하여 이 경을 읽고 외우며 부모를 위하여 죄와 허물을 참회하며 부모를 위하여 삼보께 공양하며 부모를 위하여 재계(齋戒)를 받아 지니며 부모를 위하여 보시(布施)하여 복을 지어야 하느니라.
자식된 사람이 밖에서 햇과일을 얻거든 집으로 가지고 와서 부모에게 올려라. 부모는 이것을 얻어 기뻐하며 스스로만 먹을 수 없어 먼저 삼보께 올려 공양하면 곧 보리심을 일으키게 되느니라.
부모가 병이 나면 곁을 떠나지 말고 친히 간호할 지니라. 주야로 삼보께 귀의하고 부모의 병이 낫기를 축원하며 잠시라도 은혜를 잊어서는 안되느니라.
부모가 완고하여 三보를 받들지 아니하며 어질지 못하여 남의 물건을 상하게 하고 의롭지 못하여 남의 물건을 훔치고 예절이 없어 몸을 단정히 하지 못하고 신의가 없어 남을 속이며 지혜가 없어 술에 빠지거든 자식은 그 잘못을 말하여 깨우치게 해야 하느니라.
그래도 깨우치지 아니하고 울고 호소하며 스스로 식음을 전폐하라. 부모가 비록 완고하다 하여도 자식이 죽는 것은 두려워하므로 은애의 정에 못 이겨 바른 길로 들어서게 되느니라.
부모가 마침내 오계(五戒)를 받들어 자비를 알아 죽이지 아니하고, 옳음을 알아 훔치지 아니하며, 예절을 알아 방탕하지 아니하고, 믿음을 알아 속이지 아니하며, 지혜를 알아 술에 취하지 아니하면, 이승에서는 편안하게 살고 저승에서는 천상에 나게 되어 부처님을 뵈옵고 법문을 들어 길이 지옥의 괴로움을 면하게 되느니라.
만일 능히 이렇게 하면 효순하는 자손이라 할 것이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이는 지옥에 떨어질 사람이니라. “
제 7 분 ; 불효의 과보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이르셨다. 불효한 자식은 몸이 허물어져 죽게 되면 무간 지옥에 떨어지느니라. 이 대지옥은 죽게 되면 길이와 넓이가 팔만유순(八万由旬)이나 되고, 사면에 무쇠로 된 성이 둘러 있는데 그 위에는 쇠그물로 둘러 싸여 있으며 그 땅은 붉은 쇠가 깔려 있어 뜨거운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맹렬한 불꽃은 우뢰같이 퍼져가고 번개같이 번쩍이느니라. 여기에서 끓인 구리와 무쇠 물을 죄인의 입에 부어 넣으며 무쇠로 된 뱀과 구리로 된 개가 연신 연기와 불꽃을 토하면서 죄인을 들볶고 지지고 구워서 살이 타고 기름이 끓어 그 고통은 참고 어렵고 견디기 어려우리라. 그 위에 쇠채찍과 쇠꼬챙이와 쇠망치와 쇠창이 그리고 칼과 칼날이 돌개바람처럼 몰아쳐서, 비나 구름처럼 공중에서 쏟아져 내려와서 혹은 베이느니라. 이와 같이 고통을 받기를 겁을 지내도록 끊일 사이가 없느니라. 또 이 사람은 다시 다른 지옥으로 들어가서 머리에 불화로를 이고 쇠로 만든 수레로 사지를 찢겨서 창자와 뼈와 살이 불타고 사방으로 찢어져 하루동안에 천번 살아나고 만번이나 죽게 되느니라.
이와 같은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은 모두가 전생의 五역죄와 불효의 죄보 때문이니라.
제 8 분 ; 은혜 갚는 길
이 때에 여러 대중들이 부처님의 부모의 은덕 말씀을 듣고 눈물을 흘리고 슬피 울면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 저희들은 오늘날 어떻게 하여야 부모의 깊은 은덕을 갚을 수 있으오리까.”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 부모의 은혜를 갚고자 하거든 부모를 위하여 경전을 다시 이룩하라. 이것이 참으로 부모의 은혜를 갚는 길이 되느니라. 경전 한 권을 만들면 한 부처님을 뵈울 수 있으며, 열 권을 만들면 열 부처님을 뵈울 수 있고, 백 권을 만들면 백 부처님을 뵈울 수 있으며, 능히 천 권을 만들면 천 부처님을 뵈울 수 있고, 능히 만 권을 만들면 만 부처님을 뵈울 수 있느니라. 이 사람들은 경을 만드는 공덕으로 말미암아 여러 부처님이 항상 오셔서 옹호하시므로, 그 사람의 부모는 천상에 나타나게 되어 여러 즐거움을 받으며 영원히 지옥의 고통을 여의게 되느니라.
제 9 분 ; 경의 이름 (유통분)
저 때에 여러 대중 가운데 있던 아수라(阿修羅), 가루라(加樓羅), 긴나라(緊那羅), 마후라가(摩候羅伽), 인비인(人非人) 등과 천(天), 용(龍), 야차(夜叉), 건달바(乾闥婆)와 또 여러 작은 나라의 왕들과 전륜성왕(轉輪聖王), 등 모든 대중들이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각각 원을 발하여 말하였다.
이 때에 아난이 부처님께 말씀 드렸다.
“ 세존이시여, 이 경은 이름이 무엇이오며 저희들이 저희들이 어떻게 받들어 지니오리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이르셨다.
“ 이 경은 이름을 대보부모은중경(大報父母恩重經)이라 할 것이니 이 이름으로 너희들이 항상 받들어 가질지니라.”
그 때에 천과 사람과 아수라 등 여러 대중들이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모두 크게 환희 하여 믿고 받아 지니며 받들어 행하면서 절하고 물러갔다.
“ 저희들은 오는 세상이 끝날 때까지 차라리 이 몸을 부수어 가는 먼지를 만들어 백천겁을 지날지라도 맹세코 부처님의 거룩하신 가르침을 어기지 않겠습니다.
또 차라리 백천겁 동안 혀를 백 유순 길이가 되도록 빼어내어 이것을 쇠보습으로 갈아서 피가 흘러 내를 이루더라도 맹세코 부처님의 거룩한 가르침은 어기지 않겠습니다.
또 차라리 백천자루의 칼로써 이 몸을 좌우에서 찌르더라도 맹세코 부처님의 거룩한 가르침은 어기지 않겠습니다.
또 차라리 작두와 방아로 이 몸을 찢고 부수어 백천만 조각이 나고, 가죽과 살과 힘줄과 뼈가 모두 가루가 되어 떨어져 나가기를 백천겁을 지나더라도 마침내 부처님의 거룩하신 가르침은 어기지 않겠습니다.“
13. 제장; 佛敎 倫理(불교 윤리)의 本質(본질)
“모든 악은 짓지 말고 모든 선은 힘써 하며 제 마음을 맑게 하라. 이것이 곧 불교이다.”는 칠불통계(七佛通戒)로서 널리 알려진 게송(揭頌)이다. 8만 4천으로 헤아려지는 불교 교설의 궁극적 목표는 인간 생활의 향상과 완성에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일이다.
칠불 통계의 제3구 “제 마음을 맑게 하라(自淨其意)”는 불교 윤리(佛敎 倫理)에 있어서의 선악(善惡)을 판별하는 기반을 말하는 것인데 이것이 불교 윤리(佛敎 倫理)의 특색이라 할 수 있다.
일반윤리(一般倫理)의 선악관(善惡觀)은 다분히 자기를 중심으로 한 타산(打算)적인 경향이 농후함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러한 이해(利己)적이고 타산(打算)적인 선(善)을 ‘유소득(有所得)의 선(善)’ 또는 ‘유루(有漏)의 선(善)’이라고 일컫는다.
유루(有漏)라는 말은 번뇌(煩惱)가 완전히 끊어지지 못한 상태, 즉 마음이 청정(淸淨)하지 못한 상태를 가리킨다.
그리하여 자정기의(自淨其意)를 기반으로 하는 칠불통계(七佛通戒)의 선(善), 즉 불교(佛敎)의 선(善)과는 다르다.
이에 비하여 불교(佛敎)에서 말하는 선(善)은 ‘무소득(無所得)의 선(善)’ 또는 ‘무루(無漏)의 선(善)’이라고 일컫는다.
일반윤리(一般倫理)의 선(善)이 인간 번뇌를 긍정하고 있음에 대하여 불교윤리(佛敎倫理)의 선(善)은 인간 번뇌와의 타협을 배제하고 스스로 마음을 맑게 하는 정심(淨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윤리(佛敎倫理)의 선(善)은 일체(一切)의 무명(無明) 또는 번뇌와의 타협을 거부하고 직접 우주의 질서(秩序) 즉 진리(眞理)인 법(法)과의 대면에서 이루어지는 선(善)임을 그의 본질(本質)로 한다.
14. 제장; 르네상스와 불교사상(佛敎思想)
현대사회(現代社會)의 형성은 르네상스(Renaissance)에 까지 소급(遡及)된다.
서양(西洋)에서는 르네상스 이래로 중세적(中世的) 암흑(暗黑)의 근원이었던 신본주의사상(神本主義思想)의 굴레를 벗고 인간중심주의적(人間中心主義)적 사고방식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인간이지(人間理知)의 해방을 동반하였고 이것은 자유로운 인간생활 추구에 박차를 가하여 왔다.
이 인간주의사상(人間主義思想)은 서구적인 현대(現代)의 문명사회를 형성하였고 이 새로운 문명(文明)은 전 세계를 휩쓸고 있다.
그리고 현대의 거창한 세계사적 전환의 몸부림은 그 규모가 후반기에 들어 엄청나게 확대되고 그 빠르기에 자꾸만 가속이 붙고 있다. 역사의 초기에는 자연의 위력이 너무 커서 사람들은 거의 자기 힘을 모르고 살아왔다.
그 뒤에 한때는 군주의 권력이나 신의 권위에 억눌려서 거의 자기 힘을 내 세울 수 없었다.
그러나 근세 이후 인류는 대체로 국가나 신까지도 자기의 책임으로 선택하게 되었고, 자연은 생활을 위한 터전으로 여기게 되었다.
이렇게 성장한 현대 사회는 그 사상(思想)이 다분히 불교적(佛敎的)이다. 2500여년전 석가모니께서 이 세상에 나오실 때, 이미 신본주의사상(人本主義思想)의 굴레를 벗고, 인간중심주의적(人間中心主義的) 사상방식(思想方式)을 갖기 시작했다.
불교(佛敎)는 인간중심주의적(人間中心主義的) 종교(宗敎)이다.
모든 종교의 본질(本質)을 인간구원이라 할 때 불교(佛敎)는 인간자신의 자력(自力)으로 구원하는 것이다.
이처럼 현대(現代)의 사고방식(思考方式)의 근원이었던, 르네상스 정신과, 불교사상(佛敎思想)과는 불가분(不可分)의 관계가 있다 할 수 있다.
15. 제장; 불교 사회복지
불교는 인간구제의 종교다.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고 사회를 안녕하게 하자는 것이다.
철학적으로는 고(苦), 공(空), 무상(無常), 무아(無我)를 설하고 해탈의 종교 자비의 종교라고 하지만, 결국 인간이 완전한 인격자 “불타”가 되는 길을 설하는 것이 불교이다.
한 걸음 나아가 이상 사회를 건설한다는 일도 된다.
불교의 대승보살도(大乘菩薩道) 정신과 실천을 근본으로 하는 사회복지가 현대사회의 요청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된다.
기본적 이념은 인생관으로서의 무상관(無常觀)과 상호 의존의 무아관(無我觀)이다.
불교 사회복지 활동은 인간 관계의 상호성을 현실적으로 바로 인식함으로써 그 상호적인 공동 생활 속에서 인격관계로의 지향을 중심으로 하여 서로 자타의 가치를 높이면서 인간 상호의 결합을 유지 확충할 것을 기도함에 있다.
불교는 신(神)에 의하지 않는 인간의 종교다. 인격의 완성을 목표로 하는 종교다. 그리고 불타는 이러한 인격의 완성자였다. 불교는 요컨대 기본적으로는 완성된 인격자인 불타(佛陀)에 대한 절실한 흠구(흠求)를 중심으로 하여 진실에의 깨달음이 있고 또한 영원한 생명에로 연결되는 것이다.
15.1. 한국 불교 사회복지의 역사적 실천의 예
불교 복지 사상의 대승보살도 실천의 예는 우리 나라 역사 문헌에서 많은 사례가 있다.
고려사(高麗史)에서는 동서 대비원(東西 大悲院)을 비롯한 제위보(濟危寶)및 혜민국(惠民局)등이 설립되어 진궁(賑窮), 주재(救災), 의료(醫療) 등의 사업을 행했다.
여러 기록에 나타난 바로는 구재사업은 주로 사찰에서 승려의 참여 하에 실시되는 관례였던 것이 짐작된다. 즉 불교 복지가 실천되고 있었던 것이다.
세종실록에서는 “이조 세종4년(서기 1442년) 정월에는 ‘심한 배불 풍조의 거센 소용돌이 속에서도, 도성을 처음으로 개수함에 있어서 (중략) 도성의 네곳에 구료소를 두고, 혜민국 제조(提調) 한상덕(韓尙德)이 의인(醫人) 60인을 인솔하여 노역자 중 질병, 상절자(부상자)들을 구료하게 하였다.”
이외에도 우리의 역사문헌에는 ‘불교 복지의 실천’의 예는 무수히 많다.
16. 제장; 불교의 역사
불교의 기초가 되는 것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시면서 직접 제자들을 지도하셨던 45년의 시기다.
이 시기를 불교 중에서는 가장 근본에 해당한다해서 근본불교(根本佛敎)라고 한다.
다음으로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후 약 백년동안의 불교를 원시불교(元始佛敎)라 한다.
이 백년간의 세월 속에서는 비교적 석가모니 부처님이 생존해 계실 때의 불교 모습이 잘 지켜지고 있다. 부처님이 계실 때와 별로 달라진 것 없이 그 원초성과 원시성이 보존되어 있던 불교이기 때문에 원시 불교라 한다
원시 불교 다음에 약 삼백년간의 불교 역사는 많은 부파와 분파(部派, 分派)가 나타난 불교 역사였다.
이리하여 불교의 갈래는 약 20여개의 부파로 나누어져서 각각 그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이들은 각자 독특한 교리체계를 세우며 실천 방법을 정착화하기 시작했다. 원시 불교 다음에 삼백여 년의 불교는 부파 불교의 계속이었다.
이러한 부파 불교는 교리가 훌륭하게 조직되고 실천이 왕성한 부파는 그대로 존속이 되고 그렇지 못하고 미약한 부파는 서서히 사라지는 경향이 있었다.
이리하여 부파 불교 다음에 300여년의 불교를 소승(小乘) 불교 시대라고 한다.
소승 불교란 부파 불교 중에서 남아 있는 요소로서 어떤 특징이 있고 세력이 있는 불교를 뜻하는 것이다. 소승 불교는 부파 불교의 연장을 의미한다.
이 때에 다시 불교의 광장에서는 새로운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소승 불교나 부파 불교가 다 출가 중심의 불교였고 출가 전문인들의 불교였다. 일생동안 교리를 연구하고 연마하여 매우 해박한 불교 지식을 쌓은 분들이 많았다. 뿐만 아니라, 소승 불교 시대의 고승(高僧)들께서는 철저한 수도 생활로 권위적인 존경을 받은 분이 많았다. 이에 아쉬운 점이라고 하는 것은 일반 대중들이 출가 전문 수도자들과 접근하기가 매우 어려웠다고 하는 데 있었다.
일생을 수도에 전념하고 공부에 전념한 분들은 자연히 전문적인 지식과 전문적인 훈련 과정으로 말미암아 일반 사람과는 매우 다른 면이 있었다.
그래서 일반 민중과 불교와는 많은 거리가 있었다. 이는 부처님께서 모든 인류를 해탈케 하고 항상 자비를 실천하도록 가르치신 내용과는 먼 방향에 있었다.
여기에 새롭게 대중 불교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 대중 불교 운동은 “누구나 믿을 수 있는 불교,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불교, 누구나 해탈할 수 있는 불교”가 되어야 한다고 일어난 운동이었다. 그야 말로 일반 대중의 불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대승(大乘) 불교다.
대승 불교는 불교를 사회화하고, 불교를 생활화하고, 불교를 민중화하는 것이 대승 불교의 이념이요, 실천이다.
이리하여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600년 내지 700년경에 대승 불교 운동이 아주 강력하게 일어났다.
이때부터 불교의 자비 정신이 최고로 고취되었으며 불교는 새바람을 맞게 되었다. 이러한 대승 불교 시대는 300여년간 계속되었다.
17. 제장; 절에 가려면
17.1. 절에 가면 좋은 날
17.1.1. 불교의 명절날
㊀부처님께서 탄생하신 날
이 세상의 모든 중생들이 고통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헤매이면서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가엾게 여겨 이 세상에 오신 날이다. 이 날은 음력으로 四월 초파일이니 모든 중생들이 경축하고 환희하며, 부처님은 은혜를 입게 되는 날이다.
㊁부처님께서 성도하신 날
이 사바 세계에 태어나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우리 인간이 걸어가고 있는 길을 똑같이 걸으시고 난 뒤, 이제 그 괴로움의 길에서 벗어나 해탈의 도를 이루신 날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실 때는 싣달타 태자의 몸으로 오셔서 우리 인간과 똑같은 생활을 하신 뒤 수도의 길에 들어서서 인간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깨달음의 도를 성취하신 부처님이 되신 날이다. 음력으로 12월 8일이니 이 날을 『성도재일』이라고 한다.
㊂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도를 이루시어 부처님께서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45년 간이라는 긴 세월을 교화하시다가 열반(涅槃-入滅)하신 날이다. 음력으로 2월 15일이니 육신의 몸으로 오셨던 부처님께서 육신의 몸을 떠나 영원한 진신(眞身)으로 돌아가신 날이다.
㊃부처님께서 출가하신 날
출가일은 음력 2월 8일이니 싣달타 태자로서 공중 생활을 하다가 인간의 고통의 근본을 밝히고 고뇌에서 벗어나는 해탈의 길을 찾고자 용감히 집을 떠나신 날이다. 이는 곧 진리를 향하고 바른 법을 얻기 위한 출발이라 성스러운 날인 것이다.
㊄우란분재일
또한 부처님께서 중생을 교화하시면서 현재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중생뿐만 아니라 지옥에 떨어져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는 중생들을 위하여 구제하고 천도하는 가장 좋은 날로 우란분재일, 7월 백중날(15일)을 말씀하셨다.
17.1.2. 법회가 있는 날
절에는 법회가 있다. 위에서 말한 불교의 명절 날에는 반드시 법회가 있다. 뿐만 아니라 이외에도 뜻 깊은 날에 법회가 열리고 있으니 법회가 있는 날은 절에 가는 것이 좋다.
법회는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는 정기 법회와 특별한 날에 열리는 특별 법회가 있다.
㊀정기 법회
정기적으로 매월 관음재일(음 24일)에 열리는 관음 법회, 지장재일(음 18일)에 열리는 지장 법회, 매주 일요일에 열리는 일요 법회, 또 특별한 날을 정하여 열리는 법회 등 각 사찰에 따라 정기적으로 개최되는 법회 날이 있다.
㊁특별 법회
특별 법회는 불교의 명절날이나 또는 특별히 지정된 날에 열리는 법회가 있으니 방생 법회, 대승보살계 법회, 예수재, 백일기도 등 법회가 있다.
이러한 법회 날에 절에 가면 좋은 날일 뿐만 아니라 불교 신도로서는 당연히 가야 되는 날이다.
17.1.3. 평상시 자기 마음에 우러나는 날이면 좋은 날
한 해가 시작되는 정월, 또는 그 달이 시작되는 초하룻날 또는 집안 식구의 생일날, 조상들의 제삿날, 결혼식 등 집안에 애.경사가 있는 날이나 마음으로 부처님께 공양을 오리고 싶은 날, 부처님의 가피를 원할 때, 새로운 용기를 얻고 싶을 때, 어느 날이든 마음에 우러나는 날이면 모두 좋은 날이 된다.
자칫, 절에 가면 좋지 않은 날이 있다고 하여 가리고 기피하는 경우가 있으나 좋은 일을 당하여서보다 좋지 않은 일을 만났을 때 절에 가는 것이 더욱 의의가 있을 것이다.
17.2. 사월 초파일
사월 초파일 하면 불교를 믿지 않는 한국인일 지라도 부처님 오신날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부처님 오신날의 의미를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
우리 불자(佛子)들은 부처님 오신날 봉축 행사를 통해 부처님 오신 뜻을 기린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손에 손에 연등을 들고 펼쳐지는 제등행렬은 이 땅이 불국토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케 해 주고 축제 분위기의 절정을 이룬다.
인도 가비라성 정반왕의 태자로 태어나신 싣달타 태자의 탄신일인 것이다.
온 천지에 기쁨이 쌓였던 이 때에 태자는 일곱 걸음을 걸으시고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사자후(獅子吼)를 하셨다고 한다. 이는 이 세상 모두를 뒤져도 나보다 높은 것이 없다고 하는 말씀이다.
신이 우리 인간을 창조하고 우리를 지배하고 계시다는 생각은 예로부터 사람들의 머리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어 온 것이다. 그래서 신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하는 것이 인간들의 종교적 신앙이었던 것이다.
신(神) 앞에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인간은 신과 인간의 중간에 있는 신관(神官)의 위력에 의해서 신의 은총을 받게 된다는 신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저 높은 하늘 위 어디를 뒤져도 인간을 창조하신 신, 인간을 지배하는 신이 있을 수 없다고 갈파하신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신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할 필요가 없고 신관들의 횡포에 시달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실로 이것은 서양의 중세적 암흑을 벗고 인간 중심주의적 사고방식을 갖게 된 르네상스(Renaissance)와 같은 일이 2500여년 전에 일어난 것이다. 이것을 법화경에서는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이라고 말씀하신다.
“한 큰일의 인연” 때문에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신다고 한다. 중생들에게 여래지견(如來知見)을 열어서 보이고 그 지견을 깨달아 들게(入) 하심인 것이다. 곧 성불만이 부처님의 뜻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깨달음은 절대 자유의 경지다.
17.3. 미리 준비해야 할 것
17.3.1. 마음의 준비
우리 인간의 마음은 극히 요사스럽고 변덕스러운 것이다. 조금만 좋지 않은 일이 있으면 짜증내고, 슬퍼하고, 성내고, 괴로워하며, 노여워하기 쉽고, 조금만 좋은 일이 있어도 기뻐하고 환희하고, 들뜨고 날뛰는 일이며 그 뿐인가, 전혀 아무런 노력도 없이 가당찮은 요행과 헛된 꿈을 가지기 쉽다. 이렇게 번잡스러운 것이 우리들 인간의 마음인데 이러한 마음들을 거두어 잡아 안정시켜야겠다는 마음을 내는 것이 마음의 준비다.
다시 말해서, 좋지 않은 일이나 괴로움이 있을 때 ‘그것을 벗어나 본래의 안정을 찾아야겠다.’고 하는 마음, 좋은 일, 기쁜 일이 있을 때 ‘이 기쁨이 쉬이 사라지지 않게 더욱 공덕을 쌓아야겠다.’고 하는 마음, 이러한 원(願)을 세우는 것이 마음의 준비다.
그저 구경 삼아, 관광 삼아 또는 호기심이나 요행심을 가지고 둘러보듯하는 마음의 자세에서는 아무것도 얻는 바 없게 된다. 그러나 더러 마음의 준비없이 절에 들렀다가도 신심을 일으켜 진정한 마음이 되는 경우도 없지 않다.
하지만, 절에 가야겠다고 마음을 일으켰을 때 우리는 잡스러운 일들을 제치고 마음을 가지런히, 차분히 원을 세우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17.3.2. 단정한 몸가짐의 준비
절에 가는 일은 한갓 유흥의 일이 아니다. 단정한 몸가짐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남에게 돋보이려고 화려하고 사치스러움이나 또는 보기에도 민망스럽고, 흉하고, 지저분한 몸가짐이어서는 안된다.
옛분들, 또 지극한 신심을 가진 분들은 미리 목욕 재계하는 정결한 준비까지 하였다. 특별한 차림을 준비할 필요는 없으나 평소의 차림에도 단정하고 정결한 몸가짐으로 절을 찾아야 한다.
이는 단정한 몸가짐에 진실된 마음이 깃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등산이나, 관광이나 다른 일들을 하다가 절에 갈 경우에는 그대로의 복장이어도 상관없다. 다만 어떠한 차림이라 할 지라도 단정하게 하려는 몸가짐이면 된다.
또 몸이 불편하고 환부가 있고, 생리 등이 있어 불결하므로 갈 수 없다 하는데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우리 몸뚱이는 본래 부정(不淨)한 것이 아닌가!, 오히려 생긴 그대로, 있는 그대로의 몸을 가지고 거리낌을 갖는다면 마음의 준비가 덜된 일인 것이다.
17.3.3. 공양물(供養物)의 준비
절에서는 거룩하신 부처님과 법보와 승보에 공양을 올리게 된다. 공양에는 여러 공양이 있는데, ‘나는 오늘 어떤 공양을 올릴 것인가’ 준비하는 일이 필요하다.
이미 ‘공양의 종류’에서 밝혔지만 향(香).등축(燈燭).꽃.다과(茶菓).공양미(供養米) 등이 있고 사사공양(四事供養)이 있으며 또 삼종공양(三種供養)이 있으나 처음으로 절에 찾아갈 때는 어떠한 공양물을 준비하여도 좋다.
한 가치의 향이나, 한 자루의 촛불도 좋지요. 또 할 수 있다면 모두를 준비하여도 좋다. 많고 적음에 관계가 없고 더불어 아무런 공양물의 준비없이도 갈 수 있다. 절을 하는 예경도 공양이기 때문이다.
17.3.4. 목적 행사에는 사전 협의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행사를 하기 위해 갈 때에는 그에 따른 준비에 대해서는 사전에 사찰 측과 상의가 있어야 한다. 특별히 불공을 드리는 일이나 제사를 지내는 일 등에는 그에 따른 최소한의 시간과 물품들이 따르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좋은 향초며, 잘 익은 과일이며, 깨끗한 공양미의 준비에는 우리들의 마음과 정성이 깃들여지게 되기에 이미 준비하는 과정에서부터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일이 되는 것이다. 물건으로써 우리의 마음을 다 할 수는 없는 것이나, 마음의 표시는 최소한 정성 들여진 물품의 준비로써도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17.4. 알아두어야 할 인사법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빼 놓을 수 없는 일이 인사다. 사람으로서는 꼭 해야할 일이기에 인사(人事)요, 지켜야 할 예절이 인사이기에 이런 사람의 하는 일, 지켜야 할 예절을 차리지 못하고 정신을 잃어버리는 것을 인사불성(人事不省)이라 하지 않는가! 인사에는 눈인사, 묵례(黙禮), 악수(握手), 포옹(抱擁) 등 여러 가지가 있으나 절에서 하는 인사는 합장(合掌)이다.
17.4.1. 합장(合掌)
합장의 뜻은 상대를 공경하는 마음의 표시이기도 하며 흩어진 마음을 한데 모아 일심(一心)이 되는 거룩한 모습이다. 또 갈라진 것을 한데 모아 하나로 돌아간다는 뜻이니 정신과 육체, 나와 남, 부처와 중생, 이상과 현실이 하나가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또한 우리 몸에는 신비로운 영기(靈氣)가 있고 심장을 박동 시키는 양,음의 전기가 있다고 한다. 두 손에 흐르는 이러한 기운을 하나로 합하여 서로 원활한 교류를 시킴으로써 우리 몸의 활성화를 촉진시키게 된다는 의학적인 견해도 있다.
합장에도 여러 가지가 있으나 대개 연화합장(蓮花合掌)이라 하여 연꽃 봉오리처럼 두 손을 합하는 것이다. 두 손이 융합된 믿음과 조화(調和), 근본(體)과 활용(用)이 하나가 되고, 지혜와 복덕이 구족해져 진정한 행복을 가져오는 인사법인 것이다.
합장을 할 때 손가락만 합하고 손바닥을 합하지 않는 것은 마음이 거만하고 생각이 흩어져 겉 시늉만 하는 때문이라 꺼리는 것이다.
만일 서로 주먹을 쥐고 주먹끼리 맞대거나, 손가락질하는 모습들로 인사한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불행해질 것인가!
17.4.2. 오체투지(五體投地)
우리가 서서 간단히 합장하며 허리를 굽혀 하는 인사를 합장 반배(合掌半拜)라 하고 큰 절을 드릴 때는 오체투지의 인사법으로 한다.
오체투지(五體投地)의 절은 최상의 경례법이다. 우리 몸의 다섯 군데를 땅에다 던져 예를 올리는 것이니 다섯 군데란 양쪽 팔, 양쪽 무릎, 그리고 이마다.
세상에서는 흔히 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짚고 머리를 숙여 인사하나 오체투지의 인사법은 꼭 두 무릎을 꿇고 두 팔을 땅에 대며 이마를 땅에 닿게 하여야 한다.
그리고 엉덩이가 높아지지 않게 온 몸을 땅에 붙이듯이 엎드려 절하는 것이니 이 오체투지의 예법이 가장 경건한 예법이어서 자신을 극도로 낮추고 상대방에게 가장 큰 존경을 바치는 것이다.
절하는 사람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교만한 마음이 한구석에라도 숨어 있으면 그것은 비록 형식을 갖추었더라도 진정한 절이 아닌 것이다.
육조 혜능 대사 앞에 절하는 스님이 머리가 땅에 닿지 않으므로 나무라신 일이 있다.
“절이란 본래 교만하고 거만함을 꺾는 것인데 어찌하여 머리가 땅에 닿지 않느냐? 나(我)라는 것을 내세우면 죄가 생기고 제 공로를 잊으면 그 복이 한량없느니라.” 하셨다.
18. 제장; 오계(五戒)
18.1. 불살생(不殺生)
산 목숨을 죽이지 말라.
생명 있는 것을 직접 죽이거나 남을 시켜 간접적으로 죽이거나 남이 죽이는 것을 칭찬하거나 기뻐하지도 말아야 한다.
자비의 마음으로 모든 생명 있는 것을 살려 주고 보호하여야 하며 내 몸과 같이 동체대비(同體大悲)로써 사랑할 수 있도록 인격을 승화시켜야 한다.
특히, 사람들과의 경우에 있어서는 신체적인 살상을 금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인격적인 살상을 해서도 안된다.
설사 자신과 원한의 관계에 있다 하더라도 그 원한을 물이 흘러가듯 잊어야 되고, 잊는데서 고차적인 발전이 가능한 것인데, 갖은 폭언과 복수할 마음을 돌이키지 못한다면 불자라고 할 수 없다.
모든 경우에, 우리 불자들은 서로 잘되도록 충고하는 뜻에서 잘못을 깨우쳐 주는 것도 신중하게 하거늘, 하물며 나쁜 마음으로 신,구,의, 삼업(身, 口, 意, 三業)을 지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해서야 되겠는가?
18.2. 불투도(不偸盜)
주지 않는 것을 훔치지 말라.
남의 물건을 직접 훔치거나 남을 시켜서 훔치거나 방편으로도 훔쳐서는 안되며 다른 사람이 훔치려고 계획하고 있으면 못하도록 하고 항상 다른 사람을 힘따라 도와서 복을 받고 즐겁게 하여야 한다.
성실하게 노력하여 얻어지는 자신의 분을 지켜 항상 그 분의 정도에 만족함을 느끼며 알뜰하게 근면한 마음으로 생활하여야 한다.
인간의 인생이 길다고 한들 백년이 못되는데 그 물건을 가지고 소유하는 것도 짧은 시간에 불과하고 부질없이 탐내게 되면 업보만 가중되어 사바 계를 떠날 때는 고통이 극심한 것이다.
18.3. 불사음(不邪婬)
사음하지 말라.
옷깃이 스치는 조그만 일도 아득한 세월 중 깊이 맺어진 인연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거늘, 하물며 사바계 오탁악세를 지혜롭게 벗할 수 있는 부부(夫婦)의 인연이야말로 얼마나 깊고 큰 것이겠는가?
그러므로 자기의 남편과 부인을 제외하고는 다른 모든 일에 있어서 음란한 마음을 내거나 마음을 내게 하여서는 안된다.
항상 효순스러운 마음으로서 모든 중생을 널리 구원하여 주고 깨끗하고 담백한 마음을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
18.4. 불망어(不妄語)
거짓말을 하지 말라.
스스로 거짓말을 하거나 남을 시켜 거짓말을 하게 하지 말며, 방편으로도 거짓말을 하여서는 안된다.
과거에 모든 업장도 미래에 대한 참된 계획도 지금 가지고 있는 마음이 정직하지 못하면 보람찬 발전을 계획할 수 없다.
조그마한 잘못이라도 불보살님께 참회하고 바르고 정직하게 살겠다고 굳게 결심하는 데서 과거의 모든 업장도 소멸되고 미래의 큰 계획도 한 걸음씩 향상되는 것이다.
항상 바른 말과 바른 소견을 가질 뿐만 아니라 온갖 중생들로 하여금 바른 말과 바른 소견을 갖도록 하여야 한다.
18.5. 불음주(不飮酒)
술을 마시지 말라.
술을 마셔 취하게 되면 모든 것을 어지럽혀 앞의 네 가지 금계(禁戒)를 모두 범할 수 있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율장에는 술을 팔거나 남을 시켜서 팔게 하지도 말라고 엄격하게 말씀하셨으니, 불음주에 대한 깊은 뜻을 잊어서는 안되겠다.
요즈음에는 모든 면에서 자신의 신념만을 지키다 보면 본의 아니게 대중 사회에서 소외될 수 있으니, 부득이한 경우에는 정도껏 마시되 절대로 과음해서는 안되겠으며 점차로 모든 사람이 술을 마시지 않도록 노력하여야 하겠다.
19. 제장;화랑오계{花郞五戒(=세속오계;世俗五戒)}
화랑의 생활과 교육은 엄격한 계율과 지도 이념이 자랐는데 원광법사(圓光法師)의 세속오계(화랑오계)가 삼국 통일의 원동력이 된 본보기이다. 즉,
충성으로 임금을 섬기고(事君以忠)
효도로서 어버이를 숨기고(事親以孝)
신의로서 벗을 사귀며(交友以信)
싸움에 임하여 물러나지 말 것이며(臨戰無退)
산 것을 죽일 때는 가려서 죽일 것(殺生有擇)
신도 오계와 그 조문에 있어서 다르긴 하지만 오늘날 국토 분단과 황금 만능주의에 처해 있는 우리 민족에게 있어 제 1계의 임금을 민족이나 국가로 바꾸어 본다면 이 화랑 오계야말로 군인의 정신적 자세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현 시대에 맞는 세속오계가 세워져 무리 민족의 평화적 통일에 원동력이 되어야 할 것이다.
20. 제장; 고덕하신 선사들
20.1. 西山대사
진속을 넘나들며 몸을 나누어 부처를 추구하고 보살도를 행한 불보살의 화신.
서산 스님의 사상은 <선가귀감> <선교석>에 잘 나타나 있다. <선가귀감>에서는 “선은 부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의 말씀이다.(禪是佛心 敎是佛語)” <선교석>에서는 선과 교를 더욱 선명하게 비교 분석하여 교는 선에 들어가는 방편이라 하셨다.
당시 조선시대 불교계는 교종과 선종으로 대립하여 교종은 선종을 비판하고, 선종은 교종을 업신여기고 있었다. 그가 <선교석>에서 말한 “교에서 선에 이르는 과정”이란 불교는 하나이지 결코 떼어서 두개의 교파가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사상은 불교를 거의 통일시켰고 선교겸수(禪敎兼修)하고 견성성불로서 최종대사(最終大事)로 삼는 불교를 이룩하였던 것이다.
20.2. 白坡스님 (한국의 달마)
대사는 출가한 뒤로 계율을 엄하게 수지하며 화엄 법문에 정통하고 또 격외선지(格外禪旨)에 대하여 고인이 미치지 못하는 경지를 개척하여 “선문수경(禪門手鏡)”을 저술한 바 특수한 이론이 없으므로 선문의 여론을 일으키기도 했다.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는 “화엄 동주 백파대율사 대기대용지비(大機大用之碑)”라고 특서하였다.
그 비문에 “우리 동방에 근래에 율사라는 한좀이 없더니 백파가 이에 해당된다. 대기대용(선에 대한 체와 용)은 백파의 80년 손을 써 힘을 주력한 곳이다.” 고 찬양했다. 또한 추사는 “멀리서 보면 달마인데 가까이 보면 백파로다. 달마와 백파가 서로 다르다 하지만 본디 둘이 아닌 법에 들어감이로다. 흐르는 물은 오늘이지만 밝은 달은 전생의 몸이로다.” 라고 하여 달마와 백파가 둘이라면 둘이겠지만 그 법에 있어서는 하나이므로 그 초상도 둘이면서 하나라는 뜻이다.
20.3. 萬海스님
만해선사는 살아서 죽기보다 죽어서 영생하려 했다. 공(空)의 원리를 깨달음으로써 생사를 통해 진리를 체득했다.
“ 사랑의 속박은 단단히 얽어매는 것이 풀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해탈(大解脫)은 속박에서 얻는 것입니다. 님이여, 나를 얽은 님의 사랑의 줄이 약할까봐서 나의 님을 사랑하는 줄을 곱들였습니다.”
기존 불교의 비종교적, 비신앙적, 비사회적 요인의 인습을 타파하고 새로운 진로를 개척함이다. 곧 불교의 진수를 깨닫기 위해, 토속적 미신적인 불교 세계를 파기하고 불교 본연의 대승적 경지로 유신시키자 함이 그의 사상이었다.
만해선사는 “유신이란 무엇인가, 파괴의 자손이요. 파괴란 무엇인가, 유신의 어머니다.”라고 말한다. 유신의 어머니인 파괴를 통해 진리의 부처님을 마음으로 깨닫자 함이었다.
허상에 매달린 미혹의 세계에서 벗어나 참마음을 찾으라 타이른다. 깨달음을 분별심에서 찾으려면 실패가 따르는 법, 그것은 참된 마음이 아니라 참마음을 싸고 가리고 있는 탐욕과 환상이 쌓여서 생기는 헛된 마음이라고 한다. 이에 망상을 물리치면 깨달음이 스스로 찾아옴에 번뇌의 먼지속에서도 참된 불성의 빛을 밝히고자 함이다.
비록 불성이 있다 하여도 닦지 않으면 나타나지 않음에 번뇌 속에서도 더럽혀지지 않고, 죽음에 의해서도 잃지 않는 영원 불변의 불성을 찾기란 오직 부처님과 그 법에 의해서만이 가능함에 참된 마음으로 개혁하자고 이른다.
이에 불교는 인연을 통한 신앙이요, 철학임에 유신된 불교의 민중화에 의해 그 경지에 이르자고 깨우친다. 바로 여기에 ‘조선 불교 유신론’의 참뜻을 두려고 했던 것이다.
이러한 만해선사의 불교 유신관은 우리 불교를 일본 조동종에 예속시킨 친일 불교 분쇄의 기치를 들게 하였고, 그 예속 반대의 투쟁은 3.1독립운동의 구국정신과 맥을 같이한다.
즉 유신사상의 기본 노선인 구불정신은 대중적 차원에서 구국운동의 행으로 이어진다. 바로 여기에서 만해선사의 불교 인간관의 이론과 실천을 보여준 셈이 된다.
기실 만해선사의 3.1구국 운동은 이타에의 사회적 자각 상태에서 발심된 것임에 분명하다. 만일 이것이 보살의 세계라면 이것은 자신의 불경의 체험 내용인 보리를 구하려는 노력인 동시에 일체의 타인(중생)에게도 그 진리를 체득시키고자 정진한 보살행이 아닌가.
그 본연의 이상(마음)을 추구함에 그 필연적 조건으로 동포와 동행하지 않으면 목적에 달했다고 할 수 없음이 보살도의 근본 정신이 아닌가 한다.
진실한 자기 완성은 동시에 일체의 완성을 뜻함과 같이, 그것이 대생명의 발전임에 만해선사는 3.1독립 운동의 구체적 행위 그것이 곧 대생명의 활동에 일여하는 작업임을 지시한다. 대아 구제가 곧 나의 구제가 되기 때문이다. 이 어찌 자비에의 큰 깨달음이 아닌가. 선사는 그것의 살신성인적인 실천으로써 영원 생명인 부처에 귀의코자 했음을 알 수 있다.
20.4. 순치황제 출가 시(順治皇帝 出家 詩)
순치 황제는 중국에 실재한 역사적 인물이다. 황제 전생에 인도의 수도승으로 있었는데 그 나라 임금님의 폭정에 백성들이 시달리자, 수행(선정) 가운데 나 자신이 왕이었다면 백성을 위하여 왕도로서 정치를 할 것이거늘, 하고 찰나 생각을 한 인과로 중국의 제왕이 되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부러울 것이 없는 황제 자리를 버리고 출가를 하였다.
곳곳이 총림(叢林)이요, 쌓인 것이 밥이어니
대장부 어데 간들 밥 세그릇 걱정하랴 !
황금과 백옥만이 귀한 줄을 아지 마소.
가사옷(僧服法衣) 얻어 입기 무엇보다 어려워라.
이내몸 중원천하(中原天下) 임금 노릇 하건마는,
나라와 백성걱정 마음 더욱 시끄러워
인간의 백년살이 삼만 육천 날이란 것
풍진 떠난 명산대찰 한나절에 미칠 손가.
당초에 부질없는 한 순간의 잘못으로
가사장삼 벗어 치고 곤룡포(袞龍袍)를 감게 됐네.
이 몸을 알고 보면 서천축(西天竺) 스님인데
무엇을 반연하여 제왕가(帝王家)에 떨어졌나 ?
이 몸이 나기 전에 그 무엇이 내 몸이며,
세상에 태어난 뒤 내가 과연 뉘이런가
자라나 사람노릇 잠깐동안 내라더니
눈 한번 감은 뒤에 내가 또한 뉘이런가
백년의 세상일은 하룻밤의 꿈속이요
만리의 이 강산은 한판 노름 바둑이라
대우씨(大禹氏) 九州 긋고 탕임금은 걸(桀)을 치며
진시황 六국먹자 한태조(漢太祖)가 새터닦네.
자손들은 제 스스로 제 살 복을 타고났으니
자손들을 위한다고 말 소노릇 그만하소
수천년 역사 위에 많고 적은 영웅들아
푸른 산 저문 날에 한줌 흙이 되단 말가
올적엔 기쁘다고 갈 적엔 슬프다고
속없이 인간에 와 한바퀴를 돌단 말가
애당초 오잖으면 갈 길조차 없으리니
기쁨이 없었는데 슬픔인들 있을 손가
나날이 한가로움 내 스스로 알 것이라
이 풍진 세상 속에 온갖 고통 여일세라
입으로 맛들임은 시원한 선열미(禪悅味)요,
몸위에 입은 것은 누더기 한 벌 원이로다
오호(五湖)와 사해(四海)에서 자유로운 손님 되어
부처님 도량 안에 마음대로 노닐세라.
세속을 떠나는 일, 하기 쉽다 말을 마소
숙세(宿世)에 쌓아놓은 선근(善根)없이 아니되네
十八년 지내간 일, 자유라곤 없었노라.
강산을 뺏으려고 몇 번이나 싸웠더냐
내 이제 손을 떨고 산 속으로 돌아가니
만가지 근심 걱정, 내 아랑곳할 것 없네.
21. 제장; 苦集滅道(고집멸도)
네개의 성스러운 진리를 사성제라 한다.
도를 배우고 4성제를 알면 지혜의 등불을 얻고 무지의 어둠은 사라진다.
부처님은 다만 이 사성제를 보임으로써 사람들을 이끄셨다. 가르침을 바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이 사성제에 의해서 덧없는 이 세상에서 진실한 깨달음을 열고 이 세상 사람의 안내인이 되고 의지처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이 사성제가 밝혀지면 모든 번뇌의 근원인 무명이 사리지기 때문이다.
이 인간의 세계는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 태어남도 괴로움이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도 괴로움이다. 미워하는 것을 만나지 않으면 안되는 것도, 사랑하는 것과 이별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도, 또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진실로 집착을 떠나지 않는 것은 모두 괴로움이다.
그것은 괴로움의 진리 고제(苦諦)이다. 이 인생의 괴로움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그것은 인간의 마음에 붙어있는 번뇌로부터 일어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 번뇌의 근원을 추구하면 나면서 갖추고 있는 격한 욕망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와 같은 욕망은 삶에 대한 강한 집착을 근본으로 하고 있으며 듣고 보는 것을 가지려고 하는 욕망이다. 또 바꾸어서 죽음까지도 바라게 된다. 그것은 괴로움의 원인 집제(集諦)이다. 이 번뇌의 근본을 남김없이 멸하여 모든 집착을 여의면 인간의 괴로움이 없어진다. 그것을 괴로움을 멸하는 진리, 멸제(滅諦)라고 한다. 이 괴로움을 멸하는 경지에 들기 위해서는 여덟 가지의 바른 도(八正道)를 닦지 않으면 안된다.
그 여덟 가지의 욕망을 멸하기 위한 바른 도의 진리를 도제(道諦)라고 한다.
22. 제장; 참회(懺悔)
참회는 이성의 자각에서 지난날 감성과 본능에 지배되어 온갖 죄악을 범한 것을 뉘우치고 그것을 깨끗이 씻고 다시 새로운 사람이 되겠다고 하는 정신 혁명과 인격적 개조를 뜻하는 것이다.
참회하는 마음은 부처님과 보살 앞에 진심으로 고백하여 죄책감을 느낌과 동시에 차후에는 다시 그런 죄를 범하지 않기로 맹세하는 자의식의 경계다. 그 의식으로 우리는 부처님과 불보살 앞에 예배하거나 경전을 독송하거나 부처님과 불보살의 이름을 부르고(念佛) 기도하면서 지성껏 그 용서를 비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악이 있어도 잘못임을 알아서 과실을 고쳐 선을 행한다면 죄가 날로 사그라져 후일에 가서는 꼭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다.(四十二章經)”고 참회의 효력을 말씀하셨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악을 짓고 죄를 지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죄를 죄로 알고 그 악을 악으로 아는 것이 보다 중요한 것이다.
죄를 죄로 알고 악을 악으로 알아 이를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상품(上品)의 사람이요, 죄를 알지 못하는 것이 중품(中品)의 사람이며, 죄를 죄로 알고 악을 악으로 알면서도 이를 고치려고 하지 않고 교만한 사람은 하품(下品)의 사람이다.
죄과에 대한 수치를 느끼는 인간은 자기 양심을 이해하고 자기 행위를 반조하는 지혜가 있기 때문에 결국 항상 되고 발전할 수 있는 소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신뢰와 존경과 이해가 있는 것이다.
부처님은 우리들에게 인격소유자로서의 수행하고 존경받을 지위를 각성시킴으로써 올바르고 참다운 도의 길을 걷도록 가르치셨다.
우리 불자는 죄업에 대한 참회를 통해서 선업(善業)을 쌓아감으로써 보람있고 희망찬 삶을 살아가야 하겠으며 나아가 자기회복의 실현(實現)을 이룩해야 할 것이다.
23. 제장; 발원(發願)
원(願)은 서원(誓願)이라고 한다. 하나의 목적을 세우고 그 목적을 기어코 달성하겠다고 하는 서약적인 결의를 말한다.
발원은 어리석고 나쁜 마음을 모두 버리고 부처님처럼 크고 넓고 맑은 마음으로 살아가려고 다짐하는 불자의 바람이라고도 할 수 있다.
불자에게는 누구나 원이 있다. 원은 우리의 삶에 목표를 두고 중심을 이루며, 지혜와 용기가 나오는 것이다.
먼저 불자가 갖는 대표적인 근본 원이 4가지 있다. 그것은 “첫째, 가엾은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둘째, 끝없는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 “셋째, 한없는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 “넷째, 위없는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 라고 하는 사호서원(四弘誓願)이 그것이다.
불자들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언제나 이 원을 여의지 말아야 하겠다. 우리는 온갖 어리석음 속에서 한없이 어려운 괴로움을 겪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올바른 깨달음의 길로 이끌어 맑고 밝은 삶을 누리도록 하기 위하여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 이 서원력으로 인하여 모든 불자는 번뇌에서 벗어나며 악도를 벗어나고 중생을 제도하며 불국 정토를 성취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서원은 자신의 이익만을 얻으려는 욕심이 아니라, 남도 이롭게 하려는 생활 태도다.
원(願)은 곧 희망(希望)이며 이상이다. 사람이란 참된 희망과 영원한 이상을 지님으로써 전진이 있고 향상이 있게 된다.
참된 보리 열반의 불과(佛果)를 성취하려는 불자로서 어찌 넓고 큰 희망과 이상을 지니지 않겠는까. 그 이상과 희망이 크면 클수록 그 활동과 노력도 큰 것이요, 그 노력이 클수록 그 결과도 클 것이니 불자로서 넓고 큰 서원을 세워 굳게 그 원을 닦아 나간다는 것은 참으로 거룩한 행이라고 하겠다.
우리 불자들은 이 땅에 태어난 다행스러움과 부처님 법문을 만난 경사스러움에 큰 감사와 용기를 일으켜 발원을 하고 그것을 실천할 것을 굳게 맹세하여야 겠다.
원을 세우기는 쉽지만 지속하기는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적어도 십년, 이십 년은 자기가 세운 원대로 행할 수 있는 각오가 서 있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가 세운 원을 지속적으로 실천할 때 그 원은 반드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24. 제장; 염불(念佛)
염불은 부처님께 귀의하고 예배 찬탄하고, 거룩하신 부처님을 고요한 마음을 간절히 생각하며, 부처님의 크신 공덕을 기리며, 부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염불에는 법신(法身)을 염하는 법신염불과 부처님의 공덕과 부처님의 덕을 생각하며 염불하는 관념염불과 부처님의 명호(이름)를 입으로 외는 칭명염불이 있다.
부처님께서는 “만약 사람이 있어서 날마다 여래의 이름으로 공덕을 일컬어 말한다면, 이런 중생들은 능히 어둠을 떠나 점차로 온갖 번뇌를 불살라 버릴 수 있으리라.고 하셨다.
일반적으로 염불수행하는 사람들은 부처님의 한량 벗는 공덕을 믿고 일심염불(一心念佛)하며 마음에서 일체 형상을 취하지 않고 큰 원을 세우고 정진하는 것이 원칙이다. 마음에 형상을 그리거나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하는 마음은 염불 수행에 큰 장애가 된다. 그리고 염불 시간은 되도록 일과로서 정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또 형편에 따라 염불하는 것이 좋다.
염불할 때에 큰 목소리를 내거나 낮은 목소리로 하거나 생각으로 염하는 것이면 어느 것이나 다 무방하다. 특히, 소리내어 염불하는 고성염불은 삼악도의 고통이 쉬며, 용맹스러운 정진심이 생기며, 신심(信心)이 깊어지고 모든 부처님이 환희 하시고, 정토에 왕생하는 등의 공덕이 있다고 한다.
지극하고도 깊은 마음에서 하는 염불은 주객(主客)이 끊어진 상태에 몰입하게 된다. 즉 부처님을 생각하는 자와 생각할 대상이 하나로 혼연일체가 된다. 이러한 상태를 염불삼매라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 불자는 부처님을 찬탄하고 감사의 마음으로 염불수행 함으로써 우리를 어지럽히고 있는 탐,진,치,삼독(三毒)의 번뇌를 없애야 한다. 이렇게 살아갈 때, 우리의 인생은 틀림없이 보람있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25. 제장; 기도(祈禱)
기도는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불보살님께 간절히 비는 믿음이며, 참되고 올바른 마음으로 열심히 노력하려는 스스로의 다짐이다.
기도하는 마음은 마음 약한 사람이 안이한 해결을 바라거나 요행을 바라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신앙을 모르고 기도를 모르고 진리와 자기 자신에 어두운 사람들이나 하는 말이다.
기도는 가장 지혜롭고 창조적인 열의에 찬 사람이 살아가는 생활방법이다. 기도는 생활을 진리로써 펴 나가는 창조적 수단이며 지혜로운 행동이다. 마음의 안정을 얻고 의지의 힘을 기르는 수단이 아니라 생활을 진리로써 펴나가므로 거기에는 자연히 안정과 자신과 용기가 함께 있게 된다.
사람의 정신력이란 신비한 것이다. 특히 한 곳에 집중하면 할수록 특수한 능력이 발휘된다. 예로부터 기도하여 소원을 성취했다는 영험담이 많이 있다.
우리가 불보살의 위신력을 인정하는 이상 그 감흥력도 인정하게 된다. 전기(電氣)는 어느 곳에서나 통할 수 있지만 라디오, 전화 같은 것은 저쪽 송전, 송신을 이 쪽에서 그것을 받는 청취기, 수화기의 장치가 없이는 들을 수가 없는 것이다. 불보살의 힘을 전기에 비한다면 기도의 힘은 성취기 수화기와 같다.
기도를 하자면 기본적인 마음가짐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따뜻한 심정 너그러운 마음, 즉 자비심이다. 다른 사람을 자기와 같다고 보는 자기 동일화의 정신이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 바탕이다. 그러므로 미워하거나 대립감정을 가지고는 기도는 성취될 수 없다.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부처님을 믿고 부처님의 진리를 긍정하며 진리의 한없는 은덕이 나와 나의 환경을 감싸고 키우고 있다는 사실을 깊은 마음으로 믿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과 부처님의 진리에 항상 감사하며 그 공덕을 찬탄해야 한다. 이 끝없는 감사, 찬탄이 첫째가는 기도다.
기도는 믿음직한 지혜이며 도구다. 기도의 기술을 바르게 써서 우리는 우리 생명에 깃든 부처님의 무한 공덕을 내어 쓰게 된다. 다시 말하면, 기도는 부처님께서 주신 공덕의 문을 여는 열쇠라고도 할 수 있다.
26. 제장; 독경(讀經)
독경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깊은 믿음을 내고 감사하고 환희 하는 마음으로 목소리를 내어 일심으로 불경을 외우거나 읽는 것을 말한다. 또한 독경은 법문을 굴린다는 뜻으로 전경(轉經)이라고도 한다.
경전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록한 것으로써 불교에서는 보통 법보(法寶)라 하며 부처님과 같이 신앙의 대상으로 받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불자는 독경을 통하여 부처님의 교훈을 항상 되새기며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바를 받들어 지키고 수행을 쌓아 생활에 밝은 지혜를 얻어 마침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 성불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불자가 경전을 읽고 외우는 것은 일상 생활을 통하여 마땅히 해야 할 것 중에 하나다. 믿음의 마음과 정성스럽고 경건한 마음으로 항상 부처님의 가르침을 읽고 외우면 자연히 그 마음이 깨끗해지고 안정되며, 또한 지혜가 싹트게 되므로 생활 속에서의 여러 가지 괴로운 일을 잘 해결해 나가는 힘을 기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경전을 읽으면 부처님이 영험을 보여 무조건 잘되도록 해준다던가 하는 따위로 단순한 생각을 해서는 안될 것이다.
불자가 독경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하는 신행상(信行上)의 일과인 것이며, 또한 수행 방법의 하나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정성을 다하여 순수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읽어야 한다.
한 구절 한 구절을 공경심을 내어서 정성스럽게 읽되 경전의 뜻을 안답시고 글귀의 해석이나 하고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속뜻은 모르면서 읽으면 오히려 뜻을 모르고 순수한 마음으로 읽는 것만 못하다고 한다. 물론 지혜가 있어서 경전의 말씀을 이해하고 그 뜻을 알면서 읽는다면 이는 더욱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경을 읽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읽혀서 잊어버리지 않고 항상 생활하는 가운데 실천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커다란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불자는 한문, 또는 한글 경전을 주위 가까이에 놓고 수행일과 때나 기도할 때에 반드시 독경을 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경을 읽고 외우면서 그 뜻을 관찰하면 절로 마음이 열리고 슬기로워 지므로 거친 번뇌 망상이 사라지고 보리(깨달음)의 씨앗을 심게 되는 것이다.
27. 제장; 공양(供養)
공양(Pujana)은 깨끗한 마음으로 꽃,향,촛불,등(燈),음악 등을 삼보(三寶; 佛, 法, 僧),부모,스승에게 받들어 올리거나, 우리 이웃의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어떤 물건이나 참다운 진리의 가르침을 베풀어주는 것을 말한다.
공양의 풍속은 원래 인도에서 종교적 성자(聖者)나 스승, 부모에게 가르침을 받고 그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뜻으로 음식이나 옷을 올린 데서 유래한다고 한다.
특히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것을 불공(佛供)이라고 한다.
공양하는 물건이나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몸으로 하는 예배 공경과 입으로 하는 찬탄과 뜻으로 부처님을 생각하고 존중하는 공양, 이 세 가지를 삼업공양(三業供養)이라 하며, 음식, 의복, 탕약, 방사(房舍),등을 사사공양(四事供養)이라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부처님 법을 전하여 수호하는 법공양(法供養)을 공양 중에서 가장 수승하다고 하였다.
다음에 삼종공양(三種供養)이 있으니 이공양,재공양(利供養, 財供養), 경공양,법공양(敬供養, 法供養), 행공양,관행공양(行供養, 觀行供養)이 그것이다.
이공양,재공양(利供養, 財供養)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재물,향화, 의복 등의 물자를 공양하는 일이다.
경공양,법공양(敬供養, 法供養)은 부처님을 찬탄하고 공경 예배하며 가르치신 교법(敎法)에 따라 보리심(菩提心..인생의 근본을 깨닫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서 나뿐만 아니라 남도 이익되게 하는(自利利他行) 보살의 행을 닦는 공양이다.
행공양,관행공양(行供養, 觀行供養)은 부처님의 교법을 잘 믿고 간직하여 수행하며 이 세상의 근본을 관조하여 행하는 공양이다.
공양을 올리는 것은 불,법,승 삼보를 존경하고 원을 세우며 우리의 어리석은 집착을 버리고자 하는 데에 커다란 이유가 있다. 특히, 부처님께 올리는 불공은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삶의 바른 길을 열어 보이시고 중생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데에 대한 존경과 감사를 표하는 행위다.
그러므로 불공하는 사람은 오직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공양을 올릴 뿐이다. 복덕을 바라거나 어떤 보살을 바라는 마음이 있다면 그 공양은 적은 공양이 되고 만다. 그래서 공양은 고하는 바 없이, 공양한 생각없이 항상 부족한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 최상의 공양이라고 하는 것이다.
불공을 드리기만 하면 부처님이 복을 주실 것이라는 얕은 생각을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우리는 불공함으로써 내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부처님의 한량 벗는 공덕 세계와 하나로 통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복덕은 구하지 않아도 오는 것이다. 불공과 함께 일심으로 기도할 때 새로운 가르침을 얻게 되고 자기 개혁에 의한 창조적 행이 따른다. 그러므로 복을 구하는 기도는 훌륭한 수행이 된다. 공양은 탐심을 버리고 마음을 닦아 복덕의 문을 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28. 제장; 참선(參禪)
선이란 불교 수행의 한 방법으로 고대 인도에서 시작되었다. 그 선이 중국에 건너와서 많은 변화를 가져와, 참선이라고 하는 새로운 형태의 선으로 발전되었고 이렇게 중국화된 선이 우리 나라에 들어와 우리 특유의 이론과 방법이 가미되기도 했다.
원래 선이란 범어(梵語) 드야나(Dhyana)의 음역인 선방(禪邦)의 준말인데, 그 뜻은 “조용히 생각함” “생각으로 닦음”입니다. 이 수행 방법은 불교 이전부터 인도의 수행자들이 행해오던 형식이었다. 그러나 수도의 목적과 차원의 정도에 따라 이미 그 내용과 형식이 달라졌다.
선에서는 ‘결가부좌’라는 앉음새가 있지만 중국에 와서는 이미 좌법(坐法)을 넘어서 선은 서거나 눕거나 간에 그 어느 때 어느 곳에서도 할 수 있다고 보게 되었다.
사실 우리들의 마음은 잠시도 쉬지 않는다. 눈, 귀, 코 등을 통해 끊임없는 동작이 계속된다. 이 계속되는 동작 속에서 동작의 원동력 즉, 주인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외부의 세계로 관심 하면서 방황한다. 오랜 시간을 이렇게 살아 온 나머지, 그 주인인 마음을 잊어버리고 바깥 사물이 주인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참선은 이 잊어버린 주인을 찾는 일이며 바깥으로 달아나는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려는 훈련이다.
그런데 마음을 한 곳에 모으기 위해서는 화두(話頭)를 가지게 된다. 화두는 공안(公案)이라고도 하는데 공안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역대 조사(祖師)들이 보이신 공안만도 1,700이 넘는다.
공안이란 곧 의심의 뭉치다. 예를 들면, “달마스님께서 인도에서 중국에 온 뜻이 무엇입니까?”하고 어떤 스님이 물었는 바, 조주(趙洲) 스님이 이에대해 “뜰앞의 잣나무!”라 했다.
이것은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무슨 뜻인가, 어째서 뜰 앞의 잣나무라고 했을까?” 이런 의문을 가지고 그 의심이 풀릴 때까지 의문을 던지게 된다.
화두를 들고 의심을 해 갈 때 주의해야 할 점은 일념으로 의심만 계속할 뿐 이리저리 따지거나 분별해서는 화두가 연결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망상만 더욱 조장하게 된다. 그러므로 참선에는 세 가지 마음의 준비가 있어야 한다고 한다.
28.1. 첫째, 대신근(大信根)이 있어야 한다. 대신근이란 철저한 믿음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물론 화두에 대해서도 확신을 가져야 한다.
28.2. 둘째, 대분지(大憤志)다. 대분지란 원수를 만난 듯한 분개심이다. 마치 모기가 바위를 뚫는 듯한 각오를 세워 정진해야 한다.
28.3. 셋째, 대응정(大凝情)이니, 철저한 의심이다. 철저한 의심을 가지지 않고는 화두가 타파되지 않는다. 망설이거나 주저한다면 이 일은 결코 이루어 질 수 없다.
이와 같은 한 생각으로 의심해 가노라면 갑자기 눈이 열리고 가슴이 시원해지는 경지가 온다. 이때 스스로의 존재가 이해될 뿐더러 우주의 실상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 상태를 견성(見性) 또는 대오(大悟)라고 한다.
그러므로 선은 인간의 참된 주체성을 곧 바로 열어서 인간과 진리의 참모습을 온전히 드러내는 독특한 공부다.
29. 제장; 법회(法會)
신도는 반드시 지정된 법회에 참석하여 설법을 듣고 부처님께 기도하며 원력(願力)을 세워 자기 수행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
또 이웃 친구나 누구에게든지 알려서 같이 설법을 듣게 하면 더욱 좋을 뿐 아니라, 이것이 곧 큰 공덕을 쌓는 것이며, 육바라밀(六波羅密) 중 첫째가는 보시(布施)바라밀의 법보시(法布施)를 실천하는 것이 된다.
법당에 들어가서는 항상 경건한 마음으로 부처님께 세번 절하고 옆 자리에 앉아서 법회가 시작될 때까지 반야심경을 암송기도를 하게 된다.
기도하는 방법은 관세음 보살이나 석가모니불을 염송하는 것이며 또는 조용히 좌선을 하는 것이 좋다.
30. 제장; 천도.시식(薦度.施食)
30.1. 천도.시식
천도(遷都)란 천혼(薦魂),천령(薦靈)이라 하며 죽은 이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불보살님께 재(齋)를 올리고 영혼들로 하여금 정토 극락 세계나 천상에 태어나도록 기원하여 좋은 길로 천거하는 법식이다.
시식(施食)이란 널리 베풀어 먹임이니 천도재를 올릴 때 천도하려는 천속 뿐만 아니라 선망 부모와 일체 유주 무주 고혼 등을 모두 청하여 그들에게 널리 법문과 열불을 읽어주고 음식을 베풀어주는 일이다.
천도,시식은 고통받는 모든 망령들에게 명복을 빌고 위안하여 이고득락(離苦得樂)의 길로 천거하는 일이다.
부처님께서 여러 경전에 천도,시식에 대한 말씀을 하셨다.
조상을 받들며 부모를 공양하는 일을 힘써야 할 것이며 또한 당대의 부모님뿐 아니라 상세 선망 부모 유주 무주 고혼 등 일체의 모든 중생들에게 재를 베풀고 공양을 하여 다함께 배부르고 마음을 흡족하게 법식(法食)을 베푸는 일이 공덕을 쌓는 일이라고 하신 것이다.
“7대 선망 부모와 이 세상의 살아있는 부모를 위하여 그들이 받는 고통을 벗어나게 하려거든--- 좋은 음식과 온갖 과실을 공양하고 지극한 정성으로 구제 천도의 법요를 받들어 행할지니라. 이러한 공덕으로 산 부모는 백세 장수를 하되 병고액난이 없을 것이요, 선망 부모는 아귀도를 벗어나 천상이나 인간에 태어나서 극락이 무궁하리라.”
“만약 어떤 사람이 지극한 정성으로 천도재를 베풀고 공양을 올려 복되게 하더라도 이 공덕의 7분 가운데 1분 공덕은 부모에게 가고 6분 공덕은 베푸는 이에게 이익이 돌아가느니라.” 고 말씀하셨다.
부모를 위하는 일이 곧 나 자신을 위하는 일이요, 자손을 위하는 일이며, 남에게 베푸는 공덕이 곧바로 나에게 돌아오는 일임을 분명히 가르치신 천도,시식의 일이다.
30.2. 천도,시식의 여러 가지
30.2.1. 사십구재(四十九齋)
사후 49일에 올리는 천도재를 말합니다. 또는 七.七재라 하여 사후 7일마다 재식을 베풀어 독경하고 염불하며 죽은 이가 좋은 곳으로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이는 49일 동안을 중유(中有) 또는 중음(中陰)이라 하여 죽은 뒤에 다음 생(生)을 받을 때까지의 기간이 되기 때문이다. 49재 외에 7일마다 올리는 7.7재, 또 반혼재, 백일재 등이 있다.
30.2.2. 예수재(豫修齋)
죽은 뒤에 행할 불사를 미리 생전에 닦는 재를 말합니다. 미리 사후의 길을 닦는 재식을 올리는 것이다.
30.2.3. 수륙재(水陸齋)
수륙재는 물과 육지에 있는 모든 중생들에게 공양하는 재식의 법회다. 사람뿐만 아니라, 육지나 물에 사는 모든 중생(곤충,짐승,물고기 등)에게 공양을 베풀어 천도하는 것이다.
이외에도 오백승재(五百僧齋), 천승재(千僧齋) 등 수많은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리는 재와 팔관재(八關齋) 등 수행을 중심으로 하는 재, 칠월 백중날 드리는 우란분재 등 여러 종류가 있다.
31. 제장; 西洋의 佛敎現況(불교현황)
이제 불교는 동양의 종교일 수만은 없게 되었다. 서구 지성인의 양심으로는 불교를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불교가 서양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에 벌써 지중해 연안과 그리스 로마에까지 전해졌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불교가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초 부터 였으며 20세기에 들어서서는 상당한 수준에 올라왔다.
서양 종교의 선교사들이 식민 정책의 후광을 업고 주입시켰던 아시아에서의 선교와는 달리 불교는 지금 서양인들 스스로의 자각과 관심에 의해 불교를 연구하고 전법 활동을 벌이고 있다.
지금의 서양은 활발한 불교 연구가 전개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31.1. 영국의 불교
대영제국 식민지인 인도, 버어마, 스리랑카의 영향으로 초기에는 소승 불교가 주류를 이루었지만, 1920년대쯤에서는 스즈끼 박사의 선(禪)에 관한 책들이 출현하므로써 영국 불교는 선불교가 급성장하게 되고 선불교와 더불어 대승 불교가 서서히 영국에 소개되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영국 불교는 완전히 수행위주의 불교가 되었으며, 불교가 영국에 완전히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영국 불교 단체의 주소록에 의하면 약 300여개의 단체가 있는데, 우리 나라의 본사(本寺)격에 해당되는 수도원으로부터 집 한 채에 이르는 포교당 내지는 선센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불교 대학도 하나 있고 전문 불교 서적만 소장하고 있는 도서관만도 대여섯 군데나 된다고 한다.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는 실제적이고 철두철미한 성격의 영국인들이 불교를 탐색하는 데는 거의 100년이라는 세월을 필요로 했다. 결국 영국 불교는 자리를 잡았다. 그래서 영국 불교의 장래는 매우 밝다고 하겠다.
31.2. 프랑스의 불교
프랑스는 카톨릭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국가이다. 인구 약 5천 5백만 가운데 형식적이나마 거의 대부분이 카톨릭이다.
대부분의 프랑스 인이 카톨릭이라고는 하지만 중산층과 젊은 세대의 절대 다수가 종교적 신앙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 공식 여론조사에서 밝혀졌다.
프랑스의 불교는 인도차이나에서 온 이민 불교가 현재 막강하다.
프랑스인들은 처음에는 이론적인 연구가 주가 되었으나,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직접 수행하는 불교 인구가 나타났다. 60년대부터 프랑스에서는 선센터와 티벳 불교 센터가 생겼으며 80년대에는 수행하는 불교인이 현저하게 증가하고 있다. 85년 7월경 세계적 권위지인 “르 몽드” 에서는 마침 스위스에 와 있는 다라이라마와의 인터뷰 기사를 전면 게재하는가 하면, 티벳 불교를 4회에 걸쳐서 소개하는 등 불교 붐을 일으킨 바 있다.
영구에 비해서 불교 단체 수는 적으나 질적인 면에서는 만만치 않다. 파리의 쁠라스디탈리에 본부가 있는 선센터는 지방에 큰 성을 매입하여 전용 수도장으로 사용하는 등 연간 3천여명 이상이 이곳에서 수행하고 있다고 한다. 본부 산하에 약 40여개의 선센터가 프랑스 여기저기에 있고 약 20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이 선센터는 자영 출판사까지 운영하면서 쉴새없이 불서를 간행하고 있다고 한다.
31.3. 미국의 불교
현재 200만명 정도의 불교신자가 있으며 한국 불교보다 먼저 소개된 인도의 요가, 중국의 선, 일본의 좌선, 등이 관심을 끌기 시작하면서 한국 불교의 선도 큰 매력으로 급격히 확장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한국 불교는 교민을 대상으로 하여 염불적인 불교와 미국 본토인을 위한 선불교가 병존하고 있는데 본격적으로 포교활동을 벌인 것은 1970년대에 들어와서 숭산 행원 스님이 처음이다.
그 이전에도 일붕 경보 스님등이 포교 활동을 벌여 큰 관심을 일으킨 적도 있다.
31.4. 이탈리아의 불교
카톨릭의 총본산인 교황청이 있는 바티칸 시가 수도 로마 안에 자리하고 있다. 그렇지만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신부나 수녀들이 불교에 대한 관심이 대단하다고 한다. 산스크리스트어를 서구에 알린 것도 신부였으며, 인도나 페르시아의 유명한 경전을 라틴어로 옮긴 것도 신부들에 의해서였다. 이처럼 불교가 단편적으로나마 바티칸에 알려진 것은 꽤 오래 된다.
이탈리아의 불교는 소수이나 앞으로 가장 기대되는 종교중의 하나로 부각되고 있다. 1970년대에 이탈리아 불교 협회가 조직되었고 현재는 로마를 비롯한 몇몇 도시에 선센터와 티벳 불교 포교당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해외 불교를 수업하러 나간 사람들도 꽤 있다고 한다.
31.5. 한국 불교의 해외 포교 실태
고대에는 일본에 불교 전파를 해줌으로서 해외 포교의 역사는 참으로 깊다.
1985년 현재 세계 10여개국에 한국 사찰 75곳에 스님 83명이 해외에 나가 있다.
미국엔 사찰 50곳 스님 34명, 일본엔 사찰 8곳 스님 25명, 홍콩엔 사찰 1곳 스님 2명, 대만엔 사찰 1곳 스님 8명, 캐나다는 사찰 2곳 스님 3명, 폴란드는 사찰 8곳, 독일은 사찰 1곳, 프랑스는 사찰 1곳, 스위스는 사찰 1곳 스님 1명, 호주는 사찰 1곳 스님 2명 등이 포교활동을 하고 있다.
32. 제장; 八相成道 (팔상성도)
32.1. 率來儀相 (도솔래의상)
선혜 보살이 하계 중생의 고통받음을 관찰하시고 그들을 측은히 여겨 六牙白象(육아백상)을 멍에하여 도솔천에서 카필라국의 摩耶夫人(마야 부인), 腹中(복중)에 드옵시니 그를 일러서 도솔래의상이라 한다.
32.2. 毘藍降生相 (비람강생상)
十朔(십삭)이 차서 마야 부인 당시의 관습에 따라 친정으로 거동하시다가 藍毘尼(람비니-- 룸비니)라는 동산에 이르러 無憂樹(무우수) 나무 가지를 잡으시고 右脅(우협)으로 태자를 탄생시키시니 그를 일러서 비람강생상이라 한다.
32.3. 四門遊觀相 (사문유관상)
태자께서 29세가 되셔서 東門으로부터 南門, 그리고 西門을 차례로 거동하시어 중생의 노병사(老病死)를 친히 관찰하시고, 다음날 北門으로 나가시어 出家沙門(출가 사문)의 법문을 들으시고 慨然(개연)히 환궁하셨으니 그를 일러서 사문유관상이라고 한다.
32.4. 踰城出家相 (유성출가상)
作甁天子(작병천자)의 警告(경고)를 받으시고 마부 車匿(차익)으로 하여금 健陟(건척)이라는 말을 鞍裝(안장)지어 二月八夜(이월팔야)에 성을 넘어 설산으로 향하시니 그를 일러 유성출가상이라 한다.
32.5. 雪山修道相 (설산수도상)
히말라야 산에 들어가 육년동안을 여러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苦行(고행)하는 기간을 설산수도상이라 한다.
32.6. 樹下降魔相 (수하항마상)
菩提樹下(보리수하)에서 坐定(좌정)에 들어 계실 때 마왕은 태자가 모든 장애물을 정복받고 정각을 성취할 것임을 알고 미녀를 보내 갖은 교태로 유혹했다. 그러나 태자는 넌지시 신통력을 써서 그 미녀를 마귀할멈으로 변화시켜서 이를 물리쳤다. 그리하여 태자는 나고 죽음의 근본인 愛慾(애욕)의 뿌리를 뽑은 것이다. 그러자 마왕은 크게 두려워하여 모든 신하를 불러 모아 80억 마군중을 동원하여 가지가지 험악한 형상으로 허공을 가득 채우고 천지를 뒤흔들며 태자를 습격해 왔다. 그러나 태자는 金剛定(금강정)에 든 채 어떤 경계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대자비의 법력으로 그들을 포용했다. 이로써 무량 겁을 쌓아 온 瞋에心(진에심)의 인연으로 일어나는 원한과 대립의 惡魔境(악마경)을 뿌리 뽑았다.
◇◈ 싯달타 태자의 출가 ◈◇
동쪽문 나갔을 적에 늙은 자 모습 보았네 세월이 흘러 간 뒤에 그의 환영 보는 것 같아
남쪽문 나갔을 적에 병든 자 모습 보았네 괴로움 견디지 못해 신음하는 모습 보았네 허무한 마음 달랠 길 없어 명상 속에 번민하셨네
서쪽문 나갔을 적에 죽은 자 모습 보았네 육체에 영혼이 떠난 제일 슬픈 이별 보았네 허무한 마음 달랠 길 없어 명상 속에 번민하셨네
북쪽문 나갔을 적에 구도자 모습 보았네 남루한 옷차림 속에 눈빛만은 총명하였네 반가운 마음 깨달은 마음 출가의 길 결심하셨네
왕궁의 부귀영화도 한 순간 던져 버리고 외로운 구도의 길을 구름 따라 헤매이셨네 보리수 나무 그늘 아래서 명상 속에 깨달으셨네 우주의 진리 생명의 실상 명상 속에 깨달으셨네 |
32.7. 鹿苑轉法相 (녹원전법상)
녹야원이라는 사슴 동산에 이르러 처음으로 苦集滅道(고집멸도) ; 四제法(사제법)이라는 法輪(법륜)을 굴리시니 이 때를 녹원전법상이라 한다.
32.8. 雙林涅槃相 (쌍림열반상)
사십 구년 동안에 설법을 마치시고 雙林(쌍림)으로 나아가서 涅槃(열반)에 드옵시니 이를 일러 쌍림 열반상이라 한다.
33. 제장; 연꽃 (蓮華)
연꽃은 연화(蓮花)라고도 하는데 沼澤(소택:늪지대)에 生하는 宿根草本植物(숙근초본식물)이다. 꽃의 色香이 사랑스럽고 또 진흙 가운데 나서 淸淨한 꽃을 피우는 것으로 인도에서는 古來로 珍重(진중)한 보배로 여기고, 佛敎에서도 높여서, 불타(Buddha)나 보살의 坐를 흔히 연꽃의 받침으로 한다.
연꽃은 뿌리는 진흙 속에 뻗고 잎은 수면에 떠 매끄럽게 뻗어난 줄기 끝에 꽃이 피는데 해가 뜨면서 서서히 피어나서 해가 지면서 서서히 오므리는 靑黃赤白의 우아한 꽃이다.
연꽃은 진흙 수렁에서 자라면서도 물들지 않고 더럽혀 지지 않는 깨끗함과 향기로움을 지니고 있다.
연꽃은 꽃망울의 맺힘과 동시에 蓮實(연씨)도 함께 맺혀 나오고 꽃이 핌과 동시에 연씨도 함께 實果로 성장되어 나오다 꽃이 완전히 滿開(만개)했을 때 연씨도 완전히 익어 간다. (因果同時)
또한 연꽃은 처음 꽃잎이 피어나면서는 그 속의 열매를 보호하고, 꽃잎이 떨어지면서 열매를 내 보이며, 꽃잎이 떨어지면 드디어 잘 익은 열매만 남게 된다.
이것은 연꽃의 속성으로 부처님의 一代時敎(일대시교)를 비유한 것으로 처음에는 방편(方便)의 가르침으로 시작해서 차츰차츰 제자들의 수준을 끌어올려 드디어는 방편은 떨어지고 진실한 모습, 즉 실상만이 남아 천지 우주 이대로 극락이요 불국토임을 연꽃으로 비유한 것이다.
연꽃의 색깔은 여러 가지로 피어 청련, 황련, 백련등으로 희유한 꽃이요, 아름다운 꽃이다.
연꽃은 물 속에서 피는 꽃도 있고, 혹은 수면에 떠서 피는 꽃도 있고, 물밖에 높이 솟아 있는 꽃도 있다. <부처님의 隨機說法(:수기설법) 中에서>
불교 경전에는 연꽃에 대한 말씀이 자주 나오고 특히 최고 경전이라고 불려지는 묘법연화경(묘법연화경), 華嚴經(화엄경)등 에서도 가르침을 연꽃에 비유하여 가르침을 폈다.
蓮華心(연화심)이란,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는 마음을 自性淸淨心(자성청정심)이라 하여 근본 마음은 물들지 않는 청정한 마음이므로 우리의 마음을 연꽃에 비유하여 표현한 것이다.
蓮華座(연화좌)란 불보살이 앉으시는 자리를 말하는데 이는 사바세계의 塵土(진토)와 같은 곳에 중생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물들지 않고 청정함을 연꽃에 비유한 것이다.
蓮華衣(연화의)란 스님들의 법복인 가사를 뜻하는 것으로 가사의 청정함을 연꽃에 비유한 것이다.
蓮華藏世界(연화장세계)란 불교의 가장 이상적인 세계로서 연꽃에서 出生한 세계, 또는 연꽃 중에 含藏(함장)된 세계란 뜻이다.
연화장 세계는 향수로 된 바다 가운데 커다란 연못이 피어 있듯 본래 法身佛(법신불)이 천잎의 연화대에 앉았는데 천 잎이 각각 한 세계가 되고 그곳에 화현한 일천 석가모니불이 계시며 다시 백억 나라에 모두 부처님이 계신 곳이라 한다.
* 蓮華台(연화대)
* 處染常淨(처념상정)
* 出汚泥而不染(출오니이불염) : 因果 同時
* 隨機說法(수기설법)
* 蓮華心(연화심) : 自性淸淨心
* 蓮華座(연화좌)
* 拈華微笑(염화미소)
34. 제장; 불교기 (佛敎旗)
불교기는 서기 1952년, 일본에서 거행된 “世界 佛敎徒 友誼會(세계 불교도 우의회)”에서 미국 국적을 가진 스리랑카 대표 “올코트(Colonel Henry Stell Olcott)”가 부처님께서 成道시에 성체에서 육종의 색광이 방출되는 것을 근거하여 “일면육색기(一面六色旗) 를 설계하여 세계 불교기로 제출하여 통과되어, 현재 모든 불교국가와 불교 단체에서 사용하고 있다.
청색 |
황색 |
적색
|
백색 |
주황 |
청색 |
황색 | |||||
적색 | |||||
백색 | |||||
주황 |
또한 불교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이 다섯 색깔은 부처님의 相好(상호)를 나타내는데 옆으로 그은 선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아래로 내려그은 선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영원히 변함없다는 뜻을 각각 나타내고 있다.
* 청색 : 불교의 자비와 평화를 상징.
* 황색 : 中道 즉 空有(공유)를 여윈 究竟(구경)에 철저한 것을 상징.
* 적색 : 福慧(복혜)를 성취하고 吉祥(길상)을 장엄하는 것을 상징.
* 백색 : 淸淨解脫(청정해탈)과 法爾如是(법이여시:있는 그대로의 모습) 곧, 天然(천연)의 도리를 말한다.
* 주황색 : 불법의 본질인 지혜가 견고하며 장엄함을 상징.
* 오색의 혼합 색은 眞如不二(진여불이)를 상징.
요약해서 말하면 불교기는 민족과 국적과 피부의 색을 분별하지 않고 일체 중생이 모두다 佛性이 있으며 이 마음이 부처이며, 이 마음으로 부처를 이룬다는 뜻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35. 제장; 만자(卍字)
범어 Srivatsalksana (수리밧살크사나), 万字, 萬字, 卍字 라고도 한다.
吉祥海雲(길상해운), 吉祥喜旋(길상희선) 이라고도 쓴다. 吉祥(길상)과 행운의 표시이다. 삼십이상(三十二相)의 하나로 불타의 가르침에 德相(덕상)이 있고 또 불타의 手足, 頭髮(두발)과 허리에도 있다고 한다. 이에 상당한 범어는 네 가지가 있지만 Srivatsa(슈리밧사)란 말은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이 말은 모발이 말리어 겹치고 합해져 海雲같은 모양이란 뜻이다. 따라서 卍字란 吉祥萬德(길상만덕)이 모이는 곳을 뜻한다. 또한 卍字는 십자와 마찬가지로 예로부터 세계 각지에서 사용되었는데, 그 기원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불교나 절을 나타내는 기호나 표시로 쓰이고 있다.
모양은 중심에서 오른쪽으로 도는 우만자(右卍字)와 왼쪽으로 도는 좌만자(左卍字)로 크게 나누어진다. 그런데 이 卍자를 입체적으로 형상화시켜서 세워 놓고 볼 때 앞에서 보면 卍 모양이 되지만 뒤쪽에서 보면 右卍자 모양으로 보이는 것을 알 수 있다. 인도의 옛 조각에는 右卍자가 많으나 중국, 한국, 일본에서는 굳이 구별하지는 않는다.
36. 제장; 불경(佛經)
36.1. 반야심경(般若心經)
반야심경은 경전 가운데 가장 짧고, 가장 중요한 경이다.
반야는 범어(梵語)로 ‘브라자나’ 즉 지혜라는 것으로 미흑한 세계에서 깨달음의 세계, 차별의 세계에서 무차별의 세계에 이르게 되면 그것은 곳 공(空), 즉 자유라는 것이다.
공이란 밝은 거울과 같은 것으로 거울은 물체가 나타나면 비추이고 물체가 없어지면 사라진다. 거울 그 자체로부터는 아무 것도 생기지 않으며 또한 아무 것도 멸(滅)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거울 그 자체는 엄연히 존재한다. 이 거울과 같은 마음이 되었을 때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마하반야바라밀다경”이란,
마하의 광대한 마음을 내어서 본연 천심의 슬기를 사용함으로써 도로 본연 천심인 저 언덕에 도달하게 하는 지름길이 되는 마음의 법인 부처님 말씀이다.
36.2. 천수경(千手經)
“천수천안 관세음보살 광대원만 무애대비심 다라니경”의 준 이름 관세음 보살의 대비주(大悲呪)로서 불자들에겐 친근한 경전이다.
이 경은 옛날 인도의 범어(梵語)를 그대로 우리말로 음역(音譯)하여 읽는 것이며, 정법(正法)을 수호하는 모든 불자들과 신상의 비밀 명호이기 때문에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외워야 한다.
이 다라니경은 84구절로 되어 있고 근본적인 뜻은 불보살의 비밀 주문이기 때문에 정확한 번역이 불가능한 진언 다라니이다. 본래 ‘신묘장구 대다라니’만 외우던 것을 경문의 좋은 글과 조사 스님들의 훌륭한 글을 넣어서 참회하고 발심하고 불보살께 귀의하며, 보다 빠른 성취를 위하여 우리 나라에서는 전송(前誦)과 후송(後倯)을 넣어서 외운다.
36.3. 금강경(金剛經)
이 경은 대반야바라밀경의 제9부를 이루는 것으로서 그 산스크리스트어의 원전은 인도와 그 밖의 다른 곳 수개소에 따로 보존되어 있었다. 그 것을 번역한 것도 수종 있으나 가장 많이 읽힌 것은 ‘구마라십’의 역(譯)이다.
이미 오래 전에 티벳어 기타 수개 국어로 번역되었는데 이는 이 경전의 유포가 광범한 지역에 걸쳐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특히 한문화 권에서는 선종에서 이 경전을 중시했다.
36.4. 아함경(阿含經)
아함은 산스크리스트어 ‘아아가마’를 음역한 말이다. 이 이름으로 불려지는 문헌이 현재 한역 대장경 안에는 네 가지가 있다. ①장아함경 ②중아함경 ③잡아함경 ④증일아함경 등이 그것이다.
36.5. 법화경(法華經)
정식 명칭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며, 대승 경전의 대표적 경이다.
붓다 깨달음의 참정신을 설함에 있어 비유, 상징적인 수법이 씌어져서 부처의 영원한 생명을 찬탄하고 있다. 중국 천태종의 개조인 ‘지의’는 이 경전에 바탕을 두고 천태종을 창립하였다.
종래의 경전에서는 보살만이 성불(成佛)하고 다른 자는 구제에서 빠져 있었는데 이 경의 방편품에 ‘오직 일승(一乘)의 법만이 있으며, 둘도 없고 셋도 없다’라고 설하였고 또 여래 수량품을 중심으로 불신상주(佛身常住)를 가르치고 모든 자를 구할 것을 약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경전은 조선조 세조 때 간경도감에서 번역 출판되었고 그 후 많이 사경(寫經) 되었으며 근세엔 안진호 스님 등이 번역하였고, 현대어 판에 몇 종류가 있다.
36.6. 유마경(維摩經)
유마경은 유마라는 일반 신도가 보통의 생활 그대로 불교의 진수인 공(空)의 도리를 체득하여 그것을 실천한 것이 실려 있다.
“유마힐 소설경(維摩詰 所說經)”이라고 불리는 이 경은 405년경 중국의 구마라습이 번역한 것으로서 전후 7회에 걸쳐 지겸.현장 등에 의해서 중국에서 번역되었으며, 우리 나라에는 6세기경에 퍼져서 일찍부터 널리 알려졌다.
36.7. 화엄경(華嚴經)
정식 명칭은 “대방광불 화엄경(大方廣佛 華嚴經)”이라고 부르며, 중국 동진(東晋)의 불타 발타라에 의해서 400년경에 번역되어 일찍이 우리 나라에 전해졌다.
춘원 이광수가 ‘화엄경이야말로 세계 문학의 최고 작품의 하나’라고 찬탄한 바 있는 경이다.
크고 방정하고 넓은 이치를 깨달은 부처님을 꽃같이 장엄한 경이라는 뜻으로 중국에서는 이것을 마음의 지주로 삼아 화엄종(華嚴宗)이 일어났다. 화엄경에서는 “자아를 초월한 자기, 자기 본성을 아는 것뿐만 아니라, 세계가 세계를 아는 것이다. 다시 또, 아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서 세계의 실상을 실현하는 것이다.” 여기에 화엄경의 본 뜻이 있고, 한없이 웅대한 세계가 이 경에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36.8. 열반경(涅槃經)
열반경은 소승열반경, 대승열반경이 있다. 소승열반경은 붓다의 죽음을 발판으로 하면서, 그것을 넘어 영원의 문제를 밝힌 것이다.
소승, 대승 열반경을 합쳐서 ‘죽음과 영원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결국 인간 존재(存在)의 해명이 되고, 인간성의 발견이 되어 가는 것이다.’
대승열반경에서는 인생에 대한 부정적 초월적인 자기 확립에서 긍정적 내재적인 자기 확립으로의 전환을 말하고 있다. 말하자면 인생의 현실을 그대로 둔 채, 자기를 확립해 가려는 태도다.
대승 열반경에서는 ‘인생이란 무엇인가?’ ‘인생은 왜 존재하는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탐구하는 데 있어서 크게 공헌하는 바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37. 제장; 불교의 우주관(宇宙觀)
불교의 우주관으로는 하나의 세계가 성립되고(成) 지속되고(住) 파괴되고(壞) 사라진(空) 후, 또 다른 하나의 세계가 성립되고, 지속되고, 파괴되고, 사라지는 과정을 成(성), 住(주), 壞(괴), 空(공) 이라는 네시기(4時期)를 나누어 4겁(劫)으로써 우주의 생멸 변화를 시간적인 측면에서 설명하고, 또한 우주가 얼마나 큰가 하는 공간적인 측면에서 설명할 때는 三千大千世界(삼천대천세계)를 들어 설명하며, 유정 중생이 생사 윤회하는 측면으로 설명할 때는 三界二十八天(삼계이십팔천)으로 설명한다.
37.1. 四劫 (成, 住, 壞, 空)
즉 成劫(성겁), 住劫(주겁), 壞劫(괴겁), 空劫(공겁)을 말하는데 이것은 불교에서 세계의 生滅(생멸) 변화에 시간적으로 설명하는 기본적인 관점이다.
① 成劫(성겁)
器世間(기세간)인 山河(산하), 大地(대지), 草木(초목)등과 衆生世間(중생 세간) 즉 一切有情衆生(일체유정중생)의 성립 시기를 말한다.
空劫을 지나면서 弟四禪天(제4선천) 이상 중생들의 수명이 다하고 복이 다해 더 낮은 수준으로 떨어짐에 따라 業 增上力(업 증상력)으로 말미암아 공간에 미세한 바람이 일어나서 차례로 風輪(풍륜), 水輪(수륜), 金輪(금륜)이 성립되고 金輪(금륜)위에 산과 바다, 洲(주) 즉, 須彌山(수미산), 七金山(칠금산), 四大洲(4대주)등이 성립되고, 그 위에 사천왕 도리천이 성립되어 인류및 放生(방생: 축생을 말함) 등의 거주처가 되는데 이는 지거천에 속하고 그 다음 차례로 야마천, 도솔천, 화락천, 타화자재천, 즉 空居天(공거천)이 성립되어 중생들의 업력에 따라 차례로 유정 중생이 下生(하생)하여 마지막 무간 지옥에 한 명의 지옥 중생이 생길 때까지 20劫이 걸리는데 이 시기를 成劫(성겁)이라고 한다.
② 住劫(주겁)
범어 Vivarta --- Sthayin --- Kalpa , 器世間(기세간)과 衆生世間(중생세간)이 지속되는 二十劫(20겁)의 시기를 말한다.
③ 壞劫(괴겁)
범어 Samvarta --- Kalpa , 세계가 파괴되어 가는 기간으로, 住劫(주겁)에서 空劫(공겁)에 이르는 二十中劫(20중겁)의 시기를 말한다.
유정 중생은 처음 十九劫(19겁) 동안에 지옥 중생부터 점차로 무너져 초선천(初禪天) 이상의 중생 세계로 올라가고 오직 器世間(기세간:국토 환경)만이 텅 빈 채로 남아 있게 된다. 마지막 一劫(1겁)동안에도 三災(삼재)가 일어나 이 器世間(기세간)도 파괴되는데 처음 火災(화재)에는 태양이 일곱 개가 출현하여 큰 불을 일으켜 먼저 지옥에서부터 色界(색계) 초선천까지를 다 태워 버리고 다음 水災(수재)에는 큰 장마 비가 일어나 第二禪天(제2선천) 이하가 다 침몰되고, 다음에 風災(풍재)에는 큰 바람이 일어 서로 치고 받으면서 第三禪天(제3선천) 이하를 불어 버린다. 이 때 중생들은 四禪道(사선도)를 닦아 모두 弟四禪天(제사선천) 이상으로 올라가서 二十劫(20겁)의 空劫(공겁)에 들어가게 된다. 이 壞劫(괴겁)에서는 다만 色界(색계) 第三禪天(제3선천) 邊淨天(변정천) 이하만 파괴되고 弟四禪天(제4선천) 이상은 파괴를 받지 않는다.
④ 空劫(공겁)
범어 Samvarta --- Sthayin --- Kalpa , 세계가 완전히 壞滅(괴멸)하고 다시 다음 삼계 가운데 오직 色界(색계) 弟四禪天(제4선천) 이상의 중생들이 남아서 세계가 二十劫(20겁)이라는 오랜기간동안 空虛(공허) 가운데 다시 다음의 세계가 성립하는 成劫(성겁)에 이르기 전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 劫說(겁설)
범어 Kalpa를 간단하게 음역한 것으로써 劫波(겁파)라 음역하며 오랜 기간 즉 長時(장시)라 번역한다. 劫(겁)을 번역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설이 있다.
⒜ 년, 월, 일이나 어떠한 시간의 단위로도 계산할 수 없는 무한히 긴 시간을 말한다.
⒝ 芥子劫(개자겁) ; 四方(사방) 40리의 성안에 芥子(개자)를 가득 채우고 백년마다 한 알씩 집어내어 그 개자가 다 없어질 때까지의 시간을 一劫(1겁)에 비유한 것이다.
⒞ 磐石劫(반석겁) ; 四方(사방) 40리 되는 바위를 백년마다 한 번씩 엷은 옷으로 스쳐서 마침내 그 바위가 다 닳아 없어질 때까지의 시간을 一劫(1겁)에 비유한 것이다.
⒟ 塵墨劫(진묵겁) ;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를 먹으로 삼아 그 먹이 다 닳도록 갈아서 만든 먹물로 일천국토(一千國土)를 지난 때마다 한 방울씩 떨어뜨려, 그 먹물이 없어질 때까지 지나온 세계를 부수어 만든 수없는 먼지 하나 하나를 一劫(1겁)으로 한 그 모든 劫(겁)을 三千塵墨劫(삼천진묵겁)이라고 한다.
⒠ 일반적으로 인간의 수명이 8만 4천살로부터 백년마다 한살씩 줄어서 열살이 되는 동안을 減劫(감겁)이라고 하고, 인간의 수명이 열살로부터 백년마다 한살씩 늘어나서 8만 4천살이 되는 기간을 增劫(증겁)이라 하며 이렇게 한번 줄었다가 늘어나는 기간을 一增減劫(일증감겁) 즉, 一劫(1겁)이라고 한다. 增劫(증겁) 중에는 壽命(수명), 衆生(중생), 生活道具(생활도구), 善品(선품:심성이 선량하고 총명한 것)의 4종이 증가한다고 하여 이것을 四增盛(4증성)이라하고, 減劫(감겁) 중에는 이 네 가지가 衰退(쇠퇴)한다고 한다.
37.2. 三千大千世界 ( 삼천대천세계 )
불교에서는 하나의 태양을 중심으로 한 하나의 세계를 一小世界(일소세계)라 하는데 여기는 수미산을 중심으로 七山八海(칠산팔해)를 交互(교호)로 번갈아 두르고 鐵圍山(철위산)을 가장 밖에 있는 외곽으로 한 세계를 말한다. 그래서 九山八海(구산팔해) 즉, 아홉 산과 여덟 바다인데 그 이름이 다 있다.
현대 천문학에서도 太陽系(태양계) 밖에 銀河系(은하계)가 또 끝없이 많이 전개된다고 한다. 그래서 하나의 태양계를 중심으로 여러 유성이 도는 한 단위의 세계 즉 一小世界(일소세계)를 천개 합한 것이 小千世界(소천세계)요, 이 小千世界(소천세계)를 다시 천개 합해서 中千世界(중천세계)가 되고, 이 중천세계가 다시 천개 합해져서 大千世界(대천세계)가 된다. 그래서 大千世界(대천세계)는 수치로 보면 십억소세계(十億小世界)인데 小千(소천), 中千(중천), 大千(대천)으로 합해서 말하면 천이 세 번 있으므로 삼천대천세계라고 한다.
※ 三千 大千 世界 ( 삼천 대천 세계 ) ※
★一小世界 : 須彌山(수미산)을 中心으로 七山八海를 交互(교호)로 두르고 鐵圍山(철위산)을 外廓(외곽)으로 한 世界를 말함 ( 하나의 태양 중심으로 한 세계) ★小千世界 : 一小世界를 천개 합한 수의 세계
★中千世界 : 一小千世界를 천개 합한 수의 세계
★大千世界 : 一中千世界를 천개 합한 수의 세계
(모두 합하여 대천세계의 수량은 十億小世界 )
▶一小世界 X 1000 = 一小千世界= 千小世界
▶一小千世界 X 1000 = 一中千世界= 百萬小世界
▶一中千世界 X 1000 = 一大千世界= 十億小世界
37.3. 三界二十八天(삼계이십팔천)
중생이 생사에 流轉(유전)하는 迷惑(미혹)의 세계, 곧 有情(유정)의 경계를 欲界(욕계), 色界(색계), 無色界(무색계)의 셋으로 나누고, 이 삼계는 二十八天(이십팔천)으로 세분되는데 欲界(욕계)는 사대왕천, 도리천, 야마천, 도솔천, 화락천, 타화자재천 등이 있고 色界(색계)에는 범중천, 범보천, 대범천, 소광천, 무량광천, 광음천, 소정천, 무량정천, 변정천, 무운천, 복생천, 광과천, 무상천, 무번천, 무열천, 선현천, 선견천, 아가니타천 등이 있고, 無色界(무색계)에는 공무변천, 식무변천, 무소유천 등으로 세분된다.
우리 인간세계는 삼계 가운데 欲界에 해당되고 욕계 중에서도 사대왕천에 속하며 사대왕천에는 동지국천, 남증장천, 서광목천, 북다문천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남증장천에 속하며 남증장천에는 동승신주, 남섬부주, 서우화주, 북구로주 등의 4대주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남섬부주에 속하며 남섬부주 지구촌 내의 동양 대한민국 ○○시(도) ○○○(이름), 번지가 현재 우리의 주소가 된다.
♣♣ 三界二十八天 (삼계이십팔천) ♣♣
三 界 | |||||||||||||||||||||||||||
無色界 |
色 界 |
欲 界 | |||||||||||||||||||||||||
非想非非想處天비상비비상처천 |
無所有處天
무소유처천 |
識無邊處 天
식무변처천 |
空無邊處天
공무변처천 |
정 淨 거 居 천 天 |
사四 선禪 천天 |
삼三 선禪 천天 |
이二 선禪 천天 |
초初 선禪 천天 |
공 空 거 居 천 天 |
지地 거居 천天 | |||||||||||||||||
阿迦尼 吒天 아가니타천 |
善見天
선견천 |
善現天
선현천 |
無熱天
무열천 |
無煩天
무번천 |
無想天
무상천 |
廣果天
광과천 |
福生天
복생천
|
無雲天
무운천 |
邊淨天
변정천 |
無量淨天
무량정천 |
少淨天
소정천 |
光音天
광음천 |
無量光天
무량광천 |
少光天
소광천 |
大梵天
대범천 |
梵輔天
범보천 |
梵衆天
범중천 |
他化自在天타화자재천 |
化樂天
화락천 |
率天
도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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須夜摩天
수야마 천 |
忉도 利리 天천 .......... 四사大대 王왕天천 | |||||
南增長天 |
東持國天 | ||||||||||||||||||||||||||
北 多 聞 天 |
西廣目天. |
1 ☞ 사대주 ( 四大洲 )
범어 Catvaro Dvipah, 또는 四大部洲(사대부주), 四洲(사주), 四天下(사천하), 須彌四洲(수미사주)라고도 한다. 四大洲(사대주)는 고대 인도인의 세계관으로써 須彌山(수미산) 사방의 七金山(칠금산)과 대 鐵圍山(철위산) 사이의 鹹海(함해) 가운데 있는 네개의 대주(大洲)를 말한다.
♥ 東勝身洲 (동승신주) : 이 곳에 사는 사람들의 몸매가 殊勝(수승)한 까닭에 勝身(승신)이라 일컬었고, 地形(지형)은 半月(반달)모양이며 사람의 얼굴 또한 반달형이다. 그 국토는 지극히 넓고 크며 묘함이 諸天(제천)에 비해 특별한 점이다.
♥ 南贍部洲 (남섬부주) : 원래는 포도나무의 音譯(음역)인데 本洲(본주)는 이 나무로써 이름을 얻게 되었으며 지형은 네모상자 같으며, 사람의 얼굴 또한 그러하다. 이곳의 특별한 점은 주민이 용맹스럽고 훌륭한 기억력으로 능히 좋은 業을 지으며 능히 청정 법행을 닦으며, 부처님이 이 땅에도 출현하심 등이 다른 諸天(제천)에 비해 뛰어난 점이다.
♥ 西牛貨洲 (서우화주) : 소(牛)로써 貿易(무역)하는 것으로 인해 이러한 이름을 짓게 되었고, 地形(지형)은 滿月(만월)같고, 사람의 얼굴 모양 또한 그러하다. 다른 諸天(제천)에 비해 특별한 점은 소가 많고, 양이 많고 주옥(珠玉)이 많다는 점이다.
♥ 北俱盧洲 (북구로주) : 이 지역은 위 三洲(3주)에 비해 殊勝(수승)하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을 얻게 되었고, 地形(지형)은 正方形(정방형)이며 사람의 얼굴 모양 또한 그러하다. 다른 諸天(제천)에 비해 특별한 점은 걸림이 없고 내것이라는 게 없고, 수명이 千歲(천세)라는 제일 수승한 과보를 받아서 즐거움이 많고 고통은 적지만 오직 부처님이 이 국토에는 출세(出世)하지 않은 점이 있다. 그러므로 이 곳에 태어남을 八難(팔난)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2 ☞ 八難 (팔난)
♠ 地獄 (지옥)
♠ 餓鬼 (아귀) 三惡道(삼악도)는 고통이
♠ 畜生 (축생) 심하여 팔난에 속한다.
♠ 長壽天 (장수천) : 색계 제4선천 가운데 無想天(무상천)으로서 여기는 수명이 五百劫(오백겁)이나 된다. 외도의 수행자들 중 많은 분들이 여기에 태어나서 오랜 시간 동안 불법을 보고 듣지 못하므로 八難중의 하나가 된다.
♠ 邊地 (변지) : 변지의 북구로주로서 이 곳에 태어나면 사람의 수명이 千歲(천세)이며 살아가는 동안에 요절하는 사람이 없으며, 향락을 탐착하여 敎化(교화)를 받지 아니하며, 이곳에는 부처님이 出世(출세)하지 않아 불법을 들을 수가 없으므로 팔난의 하나가 된다.
♠ 盲聾瘖瘂 (맹농음아) : 감각 기관 결함 때문.
♠ 世智辯聰 (세지변총) : 세속의 지혜, 말 잘함, 총명으로 인하여 진리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므로 팔난의 하나가 된다.
♠ 佛前佛後 (불전불후) : 부처님이 세상에 나시기 전이나 후에 태어남으로 인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얻지 못하므로 八難중의 하나가 된다.
38. 제장; 최초인간의 유래와 사회의 형성
이 세상 최초의 사람은 색계 제2선천 光音天(광음천)의 중생이 福(복)이 다하고 壽命(수명) 다한 사람이 내려오게 되었다. 광음천 중생들은 말이 없이도 몸에서 발하는 광명으로 의사 소통을 했고 몸에서 스스로 광명도 내고 신통력이 있어 자유로이 날아 다녔다. 음식을 생각만 하면 배가 부르고 시장한 줄 모르고 살았다. 그런데 이 땅에 내려와 오랜 세월이 지나자 이 땅에서 샘이 솟았다. 이를 甘泉(감천)이라 했는데 우유 같기도 하고 꿀 같기도 하여 맛이 매우 달았다. 그 때 중생들은 이 감천이 매우 맛이 좋으므로 두 손으로 움켜쥐고 퍼마시곤 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로 인하여 중생들의 몸은 거칠어지고 몸이 굳어져 천상에서의 아름답고 미묘하던 형색을 점차 잃게 되었다. 그리하여 몸에서 나던 광명은 줄어들고 감천을 조금만 먹은 사람은 아직도 날아다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너무 많이 먹은 사람은 날아다니는 능력을 잃게 되어 땅 위를 걷게 되었다.
그 후 이들이 서로 不睦(불목)하고 다투고 탐심을 내면서부터 저절로 감천은 사라지고 地肥(지비)가 생겨났다. 이 地肥(지비)도 역시 빛깔도 곱고 맛도 좋으며 향기로와 먹을 만하였다. 그리하여 중생들은 이 것을 먹고살았다. 지비를 먹고사는 동안 중생들은 또 다투게 되었다. 이들의 마음이 거칠어지자 지비는 더 이상 나지 않았다. 지비가 없어지자 새로운 식량이 생겨났는데 이를 婆螺(파라)라고 하는데 의역하여 粗厚地肥(추/조후지비)라고 하였다. 이것도 먹을 만 하고 향기로와 맛이 좋았다. 중생들은 이것을 먹으며 살다가, 서로 밀치며 다툼을 일으켰고 끝내는 파라마저도 나지 않게 되었다. 그 후 自然硬米(자연경미)가 생겨났는데 이는 겉 껍질이 없는 쌀로써 아침에 베어다 먹고나면 낮동안 또 자라서 저녁에 또다시 베어다 먹었다. 이 자연경미를 먹으면서부터 사람의 모습이 달라지게 되었는데 어떤 중생은 남자 형상이 되고 어떤 중생은 여자 형상이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말하기를 惡衆生(악중생)이 생겨났다고 말하면서 서로 살피고 쳐다보는 사이에 마음이 물들고 번뇌를 일으켜 마침내는 애착심을 일으켜 性慾(성욕)이 생기게 되었다. 이윽고 부정행을 저지르니 다른 중생들이 그를 크게 꾸짖어 다른 지방으로 3개월 동안 귀향을 보냈다. 그리하여 부정행을 한 여인이 음식을 가져다주니 妻(처)라는 말이 생겨났다. 머지않아 부정행을 저지른 자가 많이 생겨남에 따라 어떤 사람이 집을 지어 남모르게 부정행을 함에 따라 집이 있게 되었다. 이윽고 부부가 생기고 수명과 복이 다한 중생이 전에 하던 습관으로 어머니의 태중에 들어 세간에 태어나게 되니 이것이 人間 胎生(인간 태생)의 시초가 된다. 그 때 사람들은 自然硬米(자연경미)가 아침에 거두어도 저녁에 익고, 저녁에 거두어도 아침에 익어 베는 대로 다시 났지만 어떤 사람이 생각하길 하루에 두번씩 꼬박꼬박 베어다 먹으려니 귀찮다는 생각이 들어 생각해 낸 것이 저장해 두고 먹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다투어 이러하니 어떤 사람은 자기 몫을 차지하지 못하게 되었고 자연경미는 문득 겉껍질을 내게 되었고 나중에는 나지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중생들은 서로 상의하여 井(정)자 모양으로 밭의 경계를 나누게 되었다. 그 뒤 그들은 자기 밭의 쌀을 놔두고 남의 밭 곡식을 훔쳐먹는 사람이 생겼다. 그러한 행위들은 날로 심해져서 나중에는 누구나 가릴 것없이 훔치게 되자 여러 사람들은 고뇌하고 슬피 울며 가슴을 치면서 말했다. “ 세상은 자꾸 악해 가니 田宅(전택)의 경계를 달리하기 때문에 다툼이 생기고 원수를 만들지만 능히 이를 지켜 주고 판결할 사람이 없다. 우리들은 이제 평등한 주민을 세워 인민을 보호하면서, 선을 상주고 악을 벌하도록 하자. 그리고 우리들은 각각의 소유에서 조금씩 거둬 그분에게 공급하자 ” 여기에서 비로소 “백성”과 “왕”이라는 관계가 형성되었다. 그 후로 백성의 주인인 왕에게 아들이 생겼는데 그를 ‘진보’라 하였다. 그 후 진보왕의 자손이 29대 선사왕에 이르렀고, 선사왕에 10족이 있었는데 수많은 대를 거쳐 사자협왕에 이르렀다. 사자협왕에게 4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 아들이 淨飯(정반)이었다. 그의 아들이 바로 싣달다였다. 그 싯달다에게는 외아들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라훌라이다.
< 아함부 세기경 본연품 >
39. 제장; 사성지(四聖地)
39.1. 탄생지 룸비니
룹비니는 네팔(現)에 위치하고 있다. 특이하게도 힌두스텐 대평원이 끝나면서 계단처럼 층을 이루며 솟아오른 히말라야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어 天上과 天下가 함께 실감나는 곳이기도 하다. 후에 인도 마우리 왕조의 3대 아쇼카 왕은 불교에 큰 관심을 가지고 많은 불탑을 세웠는데 룸비니에도 그가 세운 석주(石柱)가 남아 있어 석주에 적힌 글귀로 그 곳에 분명히 석존의 탄생지임을 알 수 있다.
그 글귀의 내용은
“하늘에 있는 모든 신이 떠받드는 나, 왕중의 왕 나, 아쇼카는 주기 XXXX년에 이곳을 참배하노라, 이곳은 부처님이 탄생한 곳이라 여기 사는 사람들의 세금을 면제해 주고,추수기에는 타지역의 7분의 1만 받겠노라.”
또한, 아쇼카 왕은 룸비니에 마야데뷔 사(寺)를 건립하고 석존의 강탄(降誕) 모습을 담은 돌을 안치했다.
39.2. 성도지 붓다가야
붓다가야는 카필라성과 룸비니에서 정남동(正南東)으로 약 2천리 떨어진 인도 비하르주에 있다. 비하르주는 옛날 인도에서 가장 강성했던 마가다 왕국의 터전으로, 그 주에서 두번째로 큰 가야라는 도시에서 약 40리 서남쪽에 있다.
싣달타 태자는 출가하자 설산(雪山)과 왕사성(王舍城)을 거쳐 바로 가야에 오셨는데, 그 당시 가야에 가까운 니란자나 강가의 숲과 모래밭과 산이 바로 바라문교의 수행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이 곳에서 온갖 고행을 거치신 싣달타 태자는 큰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성도(成道)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그 마을 이름을 따로 붓다가야라 불렀고 그곳에는 아쇼카 대왕이 지은 대탑사가 2천년의 모든 풍상을 겪은 채 지금도 서 있다.
39.3. 초전 법륜지 녹야원
진리를 깨달아 지혜의 눈을 뜬 싣달타 태자는 부처님이 되셨다.
이제 당신의 일차적인 출가 목적인, 자기 자신의 구제를 이루었던 것이다. 그러나 석존은 많은 사람이 겪는 고통이 곧 자기 것인 양 느껴졌다. 중생들을 구제하겠다는 생각은 그 때문이었으며 맨 먼저 누구에게 설법할 것인가를 생각하다가 아직도 니란자나 강가에서 고행하고 있을, 함께 수행하던 이들이 있는 녹야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석존은 그들에게 극단적인 고행주의와 쾌락주의를 버리고 중도(中道)의 길을 택할 것을 권한다. 이어 팔정도(八正道)를 설하시자 그들은 석존의 제자가 되기를 청하게 된다.
“성내는 자에게 되받아 성내는 것은 나쁜 것이라고 알아야 한다. 성내는 자에게 되받아 성내지 않는 자는 두가지 승리를 얻은 것이다. 다른 사람이 성내는 것을 알고 정념(正念)으로 자기를 진정시키는 자는 다른 사람을 이길 뿐만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이기는 것이다.”
39.4. 열반지 쿠시나가라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시던 부처님은 2月 보름, 아난다와 비구들에게 최후의 유계(遺戒)를 주신다.
“제행은 무상하다.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라.”
최후의 순간까지도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라고 가르치셨던 석존의 입멸은 그로부터 오늘까지 찬탄의 대상이 되어 왔으며 또 앞으로 영원히 부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남게 될 것이다.
경전에 의하면 부처님은 열반에 드시기 전에 석존의 사라쌍수 숲으로 들어가 머리를 북쪽으로 향하고 오른쪽 옆구리를 아래로 두고 발을 포갠 자세를 취한 다음 선정에 든 채 열반에 들었다 한다.
40. 제장; 불자의 실천덕목
40.1. 삼십칠 각지(三十七覺支)
삼십칠 보분법(菩提分法), 삼십칠도품(道品), 또는 삼십칠 수도법(修道法)이라고도 한다. 각지(覺支;Bodhyanga)란 깨달음의 수단(手段), 즉 깨달음에 향하는 실천덕목(實踐德目)을 뜻한다.
삼십칠 각지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40.1.1. 사념처(四念處)
사념처(四念處)는 사념주(四念住)라고도 하는데
몸과 감각과 마음과 법(진리)에 대하여 그릇된 관념이나 전도된 견해를 버리고 올바를 견해를 가지도록 하는 것이다.
①신념처(身念處:봄을 不淨하다고 생각함)
②수념처(受念處:감각은 苦라고 생각함)
③심념처(心念處:생각은 無常하다고 생각함)
④법념처(法念處:모든 것은 無我하다고 생각함)
이 사념처는 不淨.苦.無常.無我한 우리의 現實을 맹목적으로 淨.樂.常.我라고 보아서는 안된다고 하는 敎訓다.
40.1.2. 사정근(四正勤)
사정단(四正斷)또는 사정승(四正勝)이라고도 하는데,
①아직 생기지 않은 惡은 미리 방지하고(未生惡令不生)
②이미 생긴 惡은 아주 끊어버리며(已生惡令永斷)
③아직 생기지 않은 善은 생기도록 하고(未生善令生)
④이미 생긴 善은 더욱 증대시킴(已生善令增長)을 말한다.
위의 사념처 다음에 닦는 법으로서 善法을 더욱 자라게 하고, 惡法은 멀리 여의려고 부지런히 수행하는 네 가지 법이다. 이 사정근이 권장되면 반드시 악을 버리고 선을 지향할 수 있으며 한 걸음 한 걸음 이상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40.1.3. 사신족(四神足, 또는 四如意足)
①욕신족(欲神足; 禪定을 얻고자 願하는 일)
②근신족(勤神足; 더욱 더 禪定하는 일)
③심신족(心神足; 마음을 올바로 유지하는 일)
④관신족(觀神足; 지혜에 의해서 생각하는 일)
이 네 가지 禪定을 體得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네 가지 조건이라고 한다.
40.1.4. 오근(五根)
오근은 오신근(五信根)이라고도 합니다. 根이란 능력을 뜻한다. 이것은 번뇌를 여의고 성도(聖道)에 이끌어 가는 다섯 가지의 근본으로 신근, 정진근, 염근, 정근, 혜근을 말한다. 信이 제일 먼저 두어진 것은 불교의 실천 수도가 信으로서 출발점으로 삼기 때문이다.
①신근(信根)은 목적에 대한 신념과 성취의 확신을 말한다.
②정진근(精進根)은 권선징악(勸善懲惡)의 노력을 말한다.
③염근(念根)은 탐욕과 근심 걱정을 항복 받는 것을 말한다.
④정근(定根)은 욕심과 악을 버리는 것을 말한다.
⑤혜근(慧根)은 거짓을 거짓으로 진리를 진리로 보는 것과 같이 진리를 바로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40.1.5. 오력(五力)
오력은 오신력(五信力)이라고도 한다. 이것도 성도(聖道)를 발생하게 하는 신력, 정진력, 염력, 정력, 혜력을 말한다. 이 오력은 앞의 오근에서 나타난 힘이며 작용이다.
①신력(信力)은 여래에 대해 청정한 믿음(淨信)을 갖고 물러나지 아니함이다.
②정진력(精進力)은 선을 짓고 악을 패하기에 부지런 하는 것이다.
③염력(念力)은 사상(思想)을 바로 갖고 나쁜 생각을 버리는 것이다.
④정력(定力)은 선정(禪定)을 닦아 어지러운 생각을 없게 하는 것이다.
⑤혜력(慧力)은 지혜를 닦아 불교의 진리인 사성제(四聖諦)를 깨닫는 것이다.
40.1.6. 칠각지(七覺支)
칠각등지(七覺等支)라고도 하며, 지혜의 기능(機能)이 가지는 일곱 단계다. 즉 진리의 깨침에 접근하는 심리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①택법각지(擇法覺支)는 모든 법(진리)을 지혜에 의해 분별사유(分別思惟)하는 것이다.
②정진각지(精進覺支)는 가지가지의 수행에 있어서 전력하여 게으르지 않고 정진 노력하는 것이다.
③희각지(喜覺支)는 참된 법(진리)을 대해서 기뻐하는 것이다.
④경안각지(輕安覺支)는 마음을 가볍고 편안하고 경쾌하게 하는 것이다.
⑤사각지(捨覺支)는 외계(外界)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평등심(平等心)을 갖는 것이다.
⑥정각지(定覺支)는 마음을 한 경지로 집중하여 번뇌 망상을 일으키지 않고 진리의 경계로 안주(安住)하는 것이다.
⑦염각지(念覺支)는 마음의 안정과 지혜의 기능을 균등하게 해 나가고 뛰어난 지혜를 갖추어 오래 전에 경험한 일을 잘 기억하여 잊지 않는 것이다.
40.1.7. 팔정도(八正道 또는 八聖道)
수행도에 있어서 취해야 하는 총괄적이고도 기본적인 태도로써 正見, 正思惟, 正語, 正業, 正命, 正精進, 正念, 正定이 그것이다.
八正道는 八支聖道, 八聖道分, 이라고도 하는데 苦가 없는 열반의 경지에 이르는 신성한 8가지의 바른 길이란 뜻이다.
40.1.7.1. 정견(正見)
바른 견해 즉, 바르게 본다는 뜻으로써 경전에는 四謫(사적)을 닦을 때 “法을 잘하여 관찰하는 것”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中阿含 分別聖謫經; 중아함 분별성적경) 불교의 진리를 깨달은 올바른 견해나 사상을 말하는 것으로써 불교수행의 목적이 되는 것을 말한다.
40.1.7.2. 정사유(正思惟)
바른 의사, 즉 바르게 思惟(사유)한다 또는 바르게 마음먹는다는 뜻으로서 “생각할 바와 안할 바를 마음에 잘 분간하는 것”이라고 한다.
40.1.7.3. 정어(正語)
바른 언어적 행위, 즉 올바른 말을 하는 것으로서, 구체적으로 妄語(거짓말), 綺語(기어;꾸며대는 말), 兩舌(두 가지 말), 惡口(악한 말)와 반대되는 “네 가지 선한 口業”을 닦는 것을 말한다.
40.1.7.4. 정업(正業)
바른 신체적 행위, 즉 신체의 행을 바르게 하는 것으로서, 不殺生(불살생), 不偸盜(불투도), 不邪淫(불사음)의 “세 가지 善한 身業”을 닦는 것을 말한다.
40.1.7.5. 정명(正命)
바른 생활, 즉 정당한 방법으로 적당한 衣食住(의식주)를 구하는 것이다.
40.1.7.6. 정정진(正精進)
바른 노력, 즉 “끊임없이 노력하여 물러남이 없이 마음을 닦는 것”을 말한다.
40.1.7.7. 정념(正念)
바른 의식, 즉 항상 바른 이상과 목표를 마음에 간직하여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다.
40.1.7.8. 정정(正定)
바른 善定, 즉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는 것인데, 三昧를 통해 잘 알려진 修行法이다.
삼십칠각지 (三十七覺支) |
사념처(四念處) |
신념처(身念處) |
수념처(受念處) | ||
심념처(心念處) | ||
법념처(法念處) | ||
사정근(四正根, 四正斷, 四正勝) |
未生惡令不生 | |
已生惡令永斷 | ||
未生善令生 | ||
已生善令增長 | ||
사신족(四神足, 四如意足) |
욕신족(欲神足) | |
근신족(勤神足) | ||
심신족(心神足) | ||
관신족(觀神足) | ||
오 근(五 根) |
신근(信根) | |
정진근(精進根) | ||
염근(念根) | ||
정근(定根) | ||
혜근(慧根) | ||
오 력(五 力) |
신력(信力) | |
정진력(精進力) | ||
염력(念力) | ||
정력(定力) | ||
혜력(慧力) | ||
칠각지(七覺支) |
택법각지(擇法覺支) | |
정진각지(精進覺支) | ||
희각지(喜覺支) | ||
경안각지(輕安覺支) | ||
사각지(捨覺支) | ||
정각지(定覺支) | ||
염각지(念覺支) | ||
팔정도(八正道, 八聖道)
|
정견(正見) | |
정사유(正思惟) | ||
정어(正語) | ||
정업(正業) | ||
정명(正命) | ||
정정진(正精進) | ||
정념(正念) | ||
정정(正定) |
40.2. 육바라밀(六波羅蜜)
육바라밀이란 보살, 즉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는 上求菩提,下化衆生을 몸소 실천하는 대승 불교의 이상적 인간상이라고 할 수 있는 보살의 여섯 가지 실천 덕목을 말한다. 우리 불자는 모두 육바라밀을 열심히 닦고 실천해야 한다.
40.2.1. 보시(布施,dana) 바라밀
자기 소유물을 필요한 사람에게 베풀어주는 것을 뜻한다. 보시는 가난한 사람에게 재물을 주는 재시(財施)와 어리석은 사람에게 가르침을 베풀어 깨치게 하는 법시(法施), 그리고 두려워하거나 공포에 떠는 사람에게 용기를 주거나 진리를 깨쳐 生死의 두려움을 덜어주는 무외시(無畏施)의 세 종류가 있다.
보시는 커다란 공덕이 있는 종교적 행위다. 金剛經에 “보살은 마땅히 법에 머무름이 없이 보시할지니, 소위 색,소리,냄새,맛,촉감 법에 머무름이 없이 베풀어주어야 한다.”고 설해져 있다. 베풀어주어도 준다는 생각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살의 보시에는 “세 가지가 청정하나니 주는 자(施者)와 받는 자(受者)와 주는 물건(施物)의 셋을 얻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大品般若經>라고 하신 것이다.
40.2.2. 지계(持戒;Ṡila) 바라밀
계율을 잘 지키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서 예의와 규범 그리고 말과 행동을 단정히 하는 수행을 말한다. 국가에는 法律이 있고 사회에는 도덕이 있다.
불교인이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계로서 五戒(불살생,불투도,불사음,불망어,불음주)가 있고 出家한 比丘와 比丘尼에게는 각각 250戒,350戒라는 구족계(具足戒)가 있다.
지계 바라밀은 이러한 法과 戒律을 잘 지키는 것인데, 이때도 계율을 지킨다는 부담감이나 자만심이 있어서는 안된다.
40.2.3. 인욕(忍辱.Ksanti) 바라밀
괴로움을 받아들여 참는 것(安受菩忍;안수보인)이다. 어떠한 어려움도 견디어 극복하고 인과법칙(因果法則)의 원리에서 현실에 성실하고 참고 견디며 사는 생활 태도다.
우리는 조금만 욕된 일을 당하면 분을 참지 못하고, 조금만 어려워도 곧 좌절하기 쉽다. 그러나 보살은 그러한 경우에 마음의 동요가 없는 것이니, 諸法이 본래 不生임을 보기 때문이다. 금강경에 如來깨서 다음과 같은 前生談을 설하고 계신다. “옛날 가리(Kalinga)왕이 내 몸을 마디마디 잘랐을 때 만일 내게 我相(아상), 인상(人相), 衆生相(중생상), 壽者相(수자상)이 있었더라면 마땅히 진한(瞋恨)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내겐 그러한 相이 없었나니라.”
40.2.4. 정진(精進.Virya)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을 말한다.
앞의 三十七覺支에서도 정진은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부처님이 열반에 임하였을 때 “生한 것은 반드시 滅하는 법이니 게으름을 피우지 말라. 게으름을 여의어서 나는 바로 깨달음에 이르렀으며 무량한 善을 낳는 것도 불방일이니라.”고 하셨다.
40.2.5. 선정(禪定;dhyana)
禪은 산란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고요히 사색하는 것을 뜻한다.
神(God)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와는 달리 불교처럼 종교의 實相을 밝혀 인간의 마음속에 깃들어 있는 無知를 타파하려는 종교에서 禪은 특히 중요한 행법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
40.2.6. 반야(般若.Prajna) 바라밀
반야는 모든 사물에 통달하여 진실 되고 밝게 비춰보는 깊은 슬기를 뜻한다.
육바라밀에서의 반야바라밀은 보시에서 선정에 이르는 다섯 바라밀의 주도자이며, 그들의 성립 기반이 되는 것이다. 다섯 바라밀은 모두 반야의 입장에서 행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육바라밀은 이렇게 반야바라밀을 중심으로 행해지기 때문에 아낌없는 베풂, 자율적인 준법정신, 끝없는 인내, 굽힐 줄 모르는 정진, 한없이 심오한 사색이 가능해 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삼세(과거,현재,미래)의 모든 부처가 無上의 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도 반야바라밀다(반야심경)에 의한 것이다.
이상의 육바라밀에 방편,원,력,지의 네 가지를 포함해서 십바라밀이라고 한다.
40.2.7. 방편(方便.Upaya) 바라밀
보살이 방편으로 여러 형상을 나타내어 중생을 제도하는 것으로, 앞의 육바라밀의 행에 의해 모든 선근(善根)을 중생들에게 돌려주어 그들과 함께 위없는 보리(菩提)를 구하는 회향방편선교(廻向方便善巧)와 일체 중생을 제도하는 구제방편선교(救濟方便善巧)가 있다.
40.2.8. 원(願.Pranidhana) 바라밀
보리열반(菩提涅槃)을 얻고자 원하고, 또한 속히 成佛을 하여 일체 중생을 이익 되고 기쁘게 하고자 원하는 것이다.
40.2.9. 력(力.Bala) 바라밀
모든 실상을 분별하여 택하고(思擇力), 용맹 수습함(修習力)을 말한다.
40.2.10. 지(智.Jnana) 바라밀
만법의 실상을 여실하게 아는 지혜는 생사하는 이 언덕을 지나서 열반의 저 언덕에 이르는 배(船)가 되므로 지바라밀이라고 한다.
*** 바라밀(波羅蜜)이란 ?
산스크리스트어의 ‘파아라미티아(Paramita)’를 한자로 옮긴 것으로 그 뜻은 ‘저 언덕(Param)에 이른 상태(ita)’라고 하며, ‘완전히 이룬(完成) 것’ 이라고도 한다.
끝없는 어리석음에 빠져있는 현실의 중생 세계와는 반대로 자비와 지혜로 가득 찬 깨달음의 세계를 바로 ‘저 언덕’이라고 한다.
육바라밀 (六波羅蜜) |
보시(布施.Dana) |
지계(持戒.Ṡila) | |
인욕(忍辱.Ksanti) | |
정진(精進.Virya) | |
선정(禪定.Dhyana) | |
반야(般若.Prajna) | |
십바라밀 (十波羅蜜) 옆 4가지 합하여 |
방편(方便.Upaya) |
원(願.Pranidhana) | |
력(力.Bala) | |
지(智.Jnana) |
40.3. 사섭법(四攝法)
섭법이란 보살이 중생을 구제할 때에 행하는 기본적인 태도, 즉 괴로움과 아픔 속에서 허덕이는 모든 사람들을 구하여 건져주기 위한 보살의 생활 방법이다.
40.3.1. 보시(布施)법
자비심으로써 모든 사람들을 대하고 재물이나 가르침(진리)을 베풀어주는 것이다.
40.3.2. 애어(愛語)법
모든 사람들에게 항시 진실 되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말로 대하는 것이다.
40.3.3. 이행(利行)법
행동, 말, 생각을 언제나 착하게 하여 善行으로 다른 사람을 이익 되게 해 주는 것이다.
40.3.4. 동사(同事)법
나와 남을 구별하지 않고 한마음 한뜻으로 고락을 함께 하거나 협력하는 것이다.
사섭법(四攝法) |
보시법(布施法) |
애어법(愛語法) | |
이행법(利行法) | |
동사법(同事法) |
40.4. 사무량심(四無量心)
사무량심이란 중생을 향한 보살의 네 가지 정신 자세를 말한다. 모든 사람들을 어여삐 여기는 큰 마음으로 우리들이 언제나 지녀야 할 착한 마음이다. 무량은 한량이 없다는 뜻으로 많은 이들이 서로 정답게 대하며, 또 한없이 많은 행복을 얻게 한다고 하여 무량이라고 하는 것이다.
40.4.1. 자(慈.Maitri) 무량심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마음으로, 자기가 받은 즐거움을 먼저 자기와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널리 모든 이들에게 나누어주는 마음이다.
40.4.2. 비(悲.Karunȁ) 무량심
남의 슬픔이나 고통을 덜어주는 마음으로, 역시 가까운 사람부터 널리 모든 이들의 괴로움까지도 벗겨주는 마음이다.
40.4.3. 희(喜.Mudita) 무량심
다른 사람이 고통을 여의고 樂을 얻거나, 그의 덕을 보고 기뻐해 주며, 서로의 마음속에 기쁨을 얻을 수 있도록 하려는 갸륵한 마음이다.
40.4.4. 사(捨.Upeksa) 무량심
고락(苦樂)과 희비(喜悲)를 초월하여 마음의 평안을 찾는 것, 또는 모든 중생을 차별하지 않고 평등하게 보는 마음이다.
사무량심(四無量心) |
자(慈.Maitri) 무량심 |
비(悲.Karunȁ) 무량심 | |
희(喜.Mudita) 무량심 | |
사(捨.Upeksa) 무량심 |
40.5. 십선(十善)
몸(身)과 말(口)과 뜻(意)으로 짓는 10가지 행위 가운데 십악(十惡)의 반대가 되는 열가지 착한 행을 말한다.
십악은 몸으로 짓는 3가지 나쁜 짓과 입으로 짓는 4가지 나쁜 짓과 뜻으로 짓는 3가지 나쁜 짓으로,
그 첫째는 산목숨을 죽이는 것(殺生), 도둑질하는 것(妄盜), 삿된 음행(邪淫)이고,
둘째는, 거짓말(妄語), 꾸며내는 말(綺語), 두가지 말(兩舌), 악한 말(惡口)이며,
셋째는 탐욕심(貪)과 성냄(瞋)과 삿된 견해(癡)등 10가지다.
이 삼악을 여의면 10 선행이 된다. 대체로 10선을 짓느냐, 10악을 범하느냐의 근본은 셋째 경우의 탐진치(貪瞋癡)의 삼독심(三毒心)을 조복(調伏)하는 정도에 달린 것이다.
殺生(살생) |
妄盜(망도) |
邪淫(사음) |
==>몸(身)으로 함 | |
妄語(망어) |
綺語(기어) |
兩舌(양설) |
惡口(악구) |
==>입 |
貪(탐) |
瞋(진) |
癡(치) |
==>뜻(意)으로 함 | |
10악(위 10개)을 멀리하면 10선이 오게 된다. 이때 가장 영향력이 강한 것이 바로 뜻으로 악을 저지르는 “탐진치”이다. |
40.6. 삼학(三學)
三學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스스로의 행동과 마음가짐과 몸가짐을 바르게 하여 열심히 배우고 닦아야 할 세 가지 배움, 즉 계학(戒學)과 정학(定學), 그리고 혜학(慧學)을 말한다.
40.6.1. 戒學
戒는 부처님께서 가르쳐 주신 계율을 잘 지키며 스스로의 말과 행동을 올바르게 가지고 심신에 대해 좋은 습관을 기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생활규범을 올바르게 갖고 인격완성의 수행생활로 나아가는 것이다.
40.6.2. 定學
定은 고요하고 차분한 마음의 선정(禪定)으로 들기 위해 마음을 하나로 모으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40.6.3. 慧學
慧는 계와 정을 잘 닦아 번뇌망상을 여의고 진리를 꿰뚫어보는 슬기로운 지혜를 얻는 것이다.
계행(戒行)을 잘 지키는 戒學이 성취되면 마음의 안정을 얻는 定學이 이룩되고, 定學이 성취되면 인간 본성이 밝아져 슬기로운 慧學이 성취되어 결국에는 견성성불(見性成佛)로 나아가는 것이다.
육바라밀 인욕 선정 지혜 보시 정진 지계 戒 定 慧三學
諸 自 衆 自 利 惡 淨 善 利 他 莫 其 奉 主 主 作 心 行 義 義
貪 瞋 癡 소 대 心 心 心 승 승 제 제 제 적 적 거 거 거 팔정도 육바라밀
見性成佛 四果증득함 |
삼학과 6바라밀 관련 해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