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행복한공부
참선수행도 없고 염불공덕마저 없으면
無禪無淨土
鐵牀倂銅柱
萬劫與千生
沒個人依
참선수행도 없고 염불공덕마저 없으면
쇠침대 위에서 구리 기둥 껴안는 격이니,
억만 겁이 지나고 천만 생을 거치도록
믿고 의지할 사람 몸 하나 얻지 못하리.
마지막 네 번째 게송은, 수행을 모르는 일반인들이 명심견성의
참선공부도 안하고 염불로 극락 왕생하려는 발원도 없이
그저 죄악을 짓는 데만 골몰하여 그 업보를 피하지 못하고
지옥에 떨어질까 염려하는 경고인 셈이오.
법문이야 수없이 많지만 오직 참선과 정토(염불)만이
가장 근기에 합당한 길이오. 깨닫지도 못하고 왕생을 발원하지도
않은 채 다른 법문이나 그럭저럭 배우다 보면,
선정과 지혜를 고르게 닦아 미혹을 끊고 진리를 증득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자비 가피력으로 업장을 짊어진 채
극락 왕생하는 길도 열리지 않게 되오.
고작해야 평생 수행한 공덕으로 내생에 천상의 복록이나 누릴 것이오.
금생에 올바른 지혜〔正智〕가 없으니 내생에 복덕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오욕(五欲)의 향락에 탐닉하여 널리 악업만 지을 게 분명하오.
일단 악업을 지으면 죄악의 보답을 피할 수 없고,
날숨 한번 안 들어오면 곧 지옥에 떨어져 쇠 침대 위에 구리 기둥이나
껴안고 억겁이 지나도록 빛과 소리와 맛 등에 탐착하여
생명을 살상한 죄악 등을 갚아야 할 것이오.
그 때는 모든 부처님과 보살님이 대자대비를 몸소 베푸시더라도
죄악의 업장 때문에 그 가피를 받을 수가 없소.
옛날부터 “수행하는 사람이 올바른 신앙으로 서방정토에 왕생하길
발원하지 않으면서 널리 많은 선행이나 닦는 것은
제3세의 원한〔第三世怨〕이라고 부른다”고 하였소.
금생의 수행으로 내생〔第三世〕에 복을 누리면서 복으로 말미암아
죄악을 짓고 그 다음 생에 타락하여 과보를 받을 것이니 말이오.
쾌락을 내생에 잠시 얻으면 고통은 영겁토록 물려받소.
설령 지옥의 죄업이 소멸되더라도 다시 아귀와 축생에 생겨나
사람 몸 회복하기가 정말 어렵고도 또 어렵게 되오.
그래서 부처님께서 손으로 흙 한 줌 집어들고 아난에게 물으셨소.
“내 손의 흙이 많으냐? 대지의 흙이 많으냐?”
아난이 당연히 “대지의 흙이 훨씬 많습니다.”고 대답했겠지요.
그러자 부처님이 이렇게 비유하셨소.
“사람 몸 얻기란 내 손의 흙과 같고, 사람 몸 잃기란 대지의 흙과 같으니라.”
“억만 겁이 지나고 천만 생을 거치도록 믿고 의지할 사람 몸 하나 얻지
못하리”라는 말은 게송의 형식에 맞추느라 아주 간단히 축약한 표현이오.
그래서 네 번째 게송을 읽고 나면 마음이 놀라고 정신이 번쩍 들지요.
모두 생사고해를 깨닫고 보리심을 내어 정토(염불) 수행이 없는 사람은
재빨리 발원 수행으로 정토를 있게 하고, 정토가 있는 사람은
용맹정진하여 결정코 극락 왕생하길 구하는 것이 요긴하고 또 요긴하오.
다른 모든 법문은 오로지 자력에 의존하여 미혹의 업장이 깨끗이 사라져야
생사를 끝낼 수 있는데, 정토 법문은 오로지 부처님의 가피력에 의지하여
업장을 짊어진 채 극락 왕생하여 성인의 경지에 합류할 수 있소.
출처:'인광대사 가언록'으로 국내 번역본은'화두 놓고 염불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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